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인도 기독교의 기원

인도기독교사 조회 수 8387 추천 수 0 2009.08.02 11:06:35

1. 인도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전승


배경

1955 12 18일 도마의 날 기념식에서 인도 초대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는 그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기억하실 것은 많은 유럽 나라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도마사도는 인도에 왔고 그래서 그에게서 기독교를 전수 받은 인도인들은 유럽 어느 나라의 크리스천들보다 오래된 역사와 조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인도 기독교는 기독교의 시작과 그 역사를 같이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도 기독교가 서구로부터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가능했을까?


인도 대륙은 3면의 바다와 북쪽의 히말라야 산맥으로 막혀져 있다. 히말라야가 커다란 장벽으로 있어 왔지만 거기에는 카이베르, 볼란과 같은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몇몇 통로가 있어왔다. 상업과 군사 원정대들은 둘다 펀잡과 인도의 다른 영역으로 침입해왔다.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의 아리안, 기원전6세기의 페르시안, 기원전 1-2세기의 스키타이인(박트리아인, 파르티아인), 기원전 4세기의 그리이스인, 1세기의 쿠샨족, 5세기의 훈족, 12-18세기의 무슬림들이 인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북인도의 역사는 북서회랑을 통해 들어온 이민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16년부터 서기 220년까지 북서 회랑을 통하여 지속적인 관계가 있어왔다. 이 기간 동안 왕래가 활발했다. 5세기의 아구스도 시절에 살았던 스트라보는 로마 제국와 인도 사이의 교역에 대해 언급했다. 칼리컷트, 코임바토르와 남인도의 몇몇 지역에서 발견된 서기 1세기의 로마 동전은 이 사실을 입증한다. 77년에 완성된 플리니의 자연적인 역사(Pliny’s Natural History)는 수에즈 운하에 인근한 항구인 묘스 호르모스와 인도의 해안과의 항해를 언급하고 있다. 플리니는 인도와 후추 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후추가 달콤함이라든지 아름답다든지 해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다른 것들과 같은 특별한 매력이 없는데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후추는 매운 맛 빼고는 과일이나 딸기처럼 관심을 끌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 얼얼하고 매운 맛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먼 인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서기 54년경 그리이스 선장 히팔로스는 몬순의 기간을 발견했고 이것을 이용하여 인더스의 입구에서 바다를 가로 지르는 직항노선을 만들었다. 이 항해의 신기원은 무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이집트의 베르니스와 인도 항구사이의 정기적인 해양무역이 있었다. 나르마다 강 입구의 바리가자(브로치), 북 콘칸에 있는 칼라야나, 망갈로르 근처의 틴두스, 현재 크랜간고르라고 불리는 무시리스, 판디얀 왕국 남단에 위치한 니르쿤람, 촐라 왕국 동쪽 해안에 있는 까베리 강 입구에 위치한 까베리파타남 또는 푸하르 등등이 당시 주요 항구였다.


로마, 이집트, 아랍, 시리아와 페르시아가 인도와 교역을 하였다. 이 교역은 종교, 문화, 사회적 측면에 있어 다양한 교류의 촉매 역할을 하였다. 중부 인도에 위치한 우짜인을 정복한 사카족은 불교도로 개종하였고 그들을 통해 불교가 중앙아시아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인교와 힌두교가 남인도에서 융성했다. 해양 왕국이었던 촐라는 인도 종교인 힌두교, 문화와 예술을 인도네시아로 전달하는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조각, 건축, 문학 등등, 천문학이 인도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국가간 상업과 문화 교류는 자유로 왔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종교적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기꺼워하였다.


상기 기록한 것이 인도에 기독교가 상륙했을 때 배경이다.


사도 바돌로매 전통

초기 교회의 위대한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ia, 265-340)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식 학파의 거두인 아렉산드리아의 판태우스가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인도에 갔을 때(190)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중 하나였던 바돌로매가 남긴 히브리어 판 마태복음 복사본을 발견,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제롬(340-420)은 유세비우스가 판태우스에 대해 기록한 것을 인정하고 판태우스를 인도로 보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데메트리우스라고 첨언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전혀 비중을 갖지 못한다. 인도의 어디에서 바돌로매가 사역을 섬겼으며 판태우스는 또 어디서 전파했는가? 얼마나 머물렀는가? 그 당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이 같은 질문이 아직 해결되지 않는채 남아 있다.

 

인도에 세워진 도마 사도의 전승


1. 말라바르 전승

사도 도마에 대한 말라바르 크리스천과 이웃 비크리스천 들에게도 구전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알려진 전승이다.

말라바르 또는 인도 전승의 내용은 사도 도마가 바다를 통해 52년경 크랜가노르에 상륙했다. 크랜가노르, 빨랴유르, 퀼론과 또 다른 몇몇 곳에서  몇몇 상위 카스트인 힌두 가족을 개종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면서 코로만델 해안을 방문했다. 거기를 지나 중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인도로 돌아와 이전에 그가 개종시켰던 지도자 가족들 사이에서 몇 지도자(목사)하에 말라바르 기독교( Christians of Malabar)를 조직하고 몇 개의 예배 장소를 세웠다. 그러고 나서 코로만달 해안으로 옮겨가다가 현재 성도마 산으로 알려진 조그만 언덕에서 순교를 했다. 그의 시신은 밀라뽀르로 옮겨졌고 그가 지은 사원에 장사되었다. 이 전승에 따라 말라바르, 서아시아,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밀라뽀르로 순례를 와서 무덤을 경배하고 있다.


2. 도마 행전(Acts of Thomas)

도마행전은 서구 전승으로 알려진 또 다른 전승을 다루고 있다.

서구 전승의 내용은 이렇다. “사도 도마는 잘 발달된 무역로를 따라서 1세기 중엽에 인도에 도착했다. 파르티아와 인도에 복음을 전했고 왕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복음을 영접했다. 인도에서 순교를 했고 거기서 장사지낸바 되었다. 후에 그의 유해는  서구(에뎃사)에 옮겨졌고 사람들은 존경과 경배를 표하고 있다.

도마행전은 3세지 중엽에 에뎃사에 있는 시리아어로 쓰여진 외경이다. 이것은 북인도 또는 파르티아의 왕이었던 군다포러스왕 제위 시절 인도의 사도 도마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


3. 밀라뽀르 전승

이 전승은 몇 역사가들에 의해 인도인 또는 말라바르 전승과는 구분되어 다루어진다. ‘코르만달 전승으로 알려진 밀라뽀르 전승은 포르투갈인에 의해 별도 전승으로서 더 유명하다. 이 전승에 따르면 사도 도마는 그의 말라바르 해안의 성공적인 사역 후 동부 해안쪽으로 가로지르며 복음을 전했다. 말라바르에서 처럼 개종자들, 특히 상위 카스트들의 개종이 있었다. 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적대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쫓기고 있던 그런 상황하에서 작은 언덕(The Little Mount)에 굴을 파고 거처를 삼았다. 그가 잡힐 무렵 굴의 지붕에 있던 구멍을 통하여 탈출해서 성 도마 언덕(St. Thomas Mount, 타밀어로 파랑기 말라이)의 정상에 자신이 지은 사원에 거처를 정했다. 추격자들은 거기서 사원 내부에 돌 십자가를 걸고 있는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후에 그이 추종자, 또는 제자들이 와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산 토메, 밀라뽀르에 있는 해변가에 장사지냈다.

이 전승의 옹호자들은 작은 언덕 동굴의 바위에 있는 손자국(발자국?), 도마 언덕(파랑기 말라이)에 있는 돌 십자가(페르시안 십자가), 밀라뽀르 산 토메 성당에 있는 무덤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 세 장소가 인도 로마 카톨릭의 관할하에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4. 다른 출처와 증거

1) 서구

i) 250년경 에뎃사에서 쓰여진 사도 신경(사도의 가르침)은 유다 도마의 활동의 영역으로서 인도를 지목하고 있다.

ii) 유다 도마 행전: 그의 활동 영역을 언급하는 것과 아울러 그 시신이 인도로부터 옮겨져 에뎃사에 매장되고 그 순교일인 7 3일을 기념일로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iii)  시리아의 찬송가 작가 성 에프라임(373년 사망)은 그의 찬송가인 사도 도마에 대해에서 인도에서의 사도 도마의 선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iv)  성 그레고리 나지안젠(4세기)은 사도 도마를 인도와 연관지었다.

v) 성 밀란의 암브로스(333-397) 은 도마가 인도에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그 나라들이 비록 산맥들로 막혀 있었어도 도마에게 있어 인도, 마태에게 페르시아처럼 그들에게는 접근이 가능했다. …” 그의 인도에 대한 지식은 그리이스와 라틴 고전은 물론 여행자들의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vi) 투어(Tours)의 감독 그레고리(538-593)는 그의 책 영광스런 순교에서 사도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고 그의 거룩한 유해는 에뎃사로 옮겨져 장사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안장된 인도의 그 장소에는 괄목할만한 크기의 수도원이 서있다여기있는 데오도어가 그 장소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vii)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인도에서 사역한 사도 도마와 바돌로매의 전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같은 해 시레번과 애달스탄의 감독 시그헬름은 로마(마리넘 교황)에게 알프레드왕이 명령한 빈민 구조품을 전달하도록 하고 거기다 인도에서 사도 도마와 바돌로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감독과 그의 동료가 사도 도마의 무덤을 방문하고 향료와 다른 뱃짐을 싣고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viii) 네스토리안 감독(1222) 마르 솔로몬은 그의 책 벌의 책에서 도마 전승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도마는 유다 족속 예루살렘 출신이다. 그는 페르시아, 메데와 인도에서 선교했다. 그리고 인도의 왕의 딸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창에 찔려 죽었다. 상인 합반이 그의 시신을 가져와 주님의 축복받은 도시 에뎃사에 장사했다. 다른 어떤 이는 인도에 있는 도시 마흐루프에 장사되었다고 한다.”

ix) 베네치아 여행가(베니스로부터 온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인도에 사도 도마의 무덤을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1292) 그에 따르면 사도 도마의 시신은 말라바르 지방의 어떤 도시에 안장되어 있다.

x) 프란시스 수도승 몽테 코르비노의 존은 중국으로 가는 도중 인도에 얼마동안 머물렀다. 1305 1 8일자의 베이징으로부터 온 그의 서신에서 그는 성 사도 도마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xi) 포르데노네의 오도리는 그의 인도 여행기(1324)에서 후추가 자라는 마니바르 라는 지역을 갖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축복받은 사도 도마의 시신이 있는 지역은 모르바르라고 말한다.

xii) 마리그놀리의 존은 성 도마교회가 있는 인도 지역을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을 가지고 있다.(1394) 그에 따르면 도마 크리스천들은 후추 농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지역 왕이 하사한 땅이다. 그는 모아바르는 성 도마가 지은 교회가 있는 지역이다라고 말한다.

xii) 콘티의 니콜로는 1430년에 성도마의 무덤을 방문했고 계속 나아가며 니콜로는 인더스를 넘어 두번째 만(벵갈 만)에 위치한 말레뿌르라는 해안도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성도마의 시신이 있는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이 장소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천명 가량의 네스토리안이라는 이교도들에 의해 경배되고 있었다.” 


2) 인도인

인도 전승은 계승하는 세대로 구전되었는데 지속적으로 말라바르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켜졌다. 이 전승에 대한 몇몇 구체적인 예는 람반(랍반), 도마 팟뚜, 비라댠 팟뚜와 마르감깔리 팟뚜와 같은 몇 노래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라단 팟뚜(노래)는 구전이다. 이것은 어떤 사회, 종교적인 행사에서 노래로 도마 크리스천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특정한 힌두 가족의 소유이다. 람반(랍반) 도마 팟뚜(람반 도마의 노래)는 구전 형태이고 1601년 니라남에 있는 말리에칼 가족의 48대째 제사장이었어던 토마스 람반 말리에칼이 글로 남겼다. 이것은 유다 도마행전과 흡사하다.


마르감 깔리 팟뚜(행복한 날의 노래)는 성 도마에 의해 말라바르에 소개되었던 어떻게 마르감 또는 기독교인의 길과 이의 경배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1792년에 모아져 편집되었다.


마라바르에 성도마가 개종시킨 가족은 파카로마땀, 산카라뿌리, 깔리, 깔리카우, 코이깜, 마데이뿌르, 무또달, 네둠빨리, 파나깜마땀, 꼬타깔리 등등 이다. 그들은 단호하게 자신들이 1세기에 성도마에 의해 개종된 것을 확신한다.


성도마가 교회를 세웠다고 여겨지는 7군데는 소코트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와서 정착한 무역 센터였다. 그래서 이것은 성도마가 이곳에 상인들의 일원으로 그곳에 간 가능성으로 고려되고 이곳을 흩어진 유대인과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계기로 삼았다.

밀라뽀르에 있는 무덤은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의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전승을 세우는데 있어 문제점

우리는 의심을 불식할만한 그 문제를 입증할 현재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을 우리에게 말한 1,2세기 서적, 비문, 또는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3세기에 와서야 고대 기독교 저술가들이 이것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마저도 희미한 암시이지 전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초대 교회를 통하여 인도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서는 전승을 성립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인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에는 그들의 저술에 모순이 있다. 도마가 인도에서 전파했던 지역은 13세기 솔로몬 감독이 그의 무덤을 마흐루프로 명명할 때까지 거론되지 않았다. 13, 14, 15세기의 유럽 여행자들은 도마 크리스천들을 보았으나 그곳을 후추가 자라는 땅으로서 인식하였고 다른 이름으로 그곳을 불렀다. 말라바르를 제외하고는 후추가 자라는 곳을 알려지지 않았던 고로 우리는 그들의 참조를 말라바르로 택할 수 있다.


밀라뽀르에 있는 무덤은 성 도마 것으로 알려져 왔다. 1523년에 무덤을 연 포르투갈은 그 안에서 창의 쇠머리와 함께 몇 뼈 조각과 해골의 잔해, 붉은 모래()을 담은 그릇을 발견했다. 툼이 누여진 방향은 보통 크리스천 방식으로 놓여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이 도마의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 의문이 생겨났다. 한편 그 무덤에 사용된 벽돌은 퐁디체리의 남부 아리카메두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크기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것은 밀라뽀르에 있는 무덤은 1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카메두는 1세기 중엽 또는 1세기에서 2세기 중엽까지 로마 교역장소 였다. 이것은 1945년에 발굴되었다. 가장 오래된 아리카메두 벽돌(50)가 바로 밀라뽀르 무덤에 있는 것과 같은 크기다.


크리스천 시대의 도래 이전에 케랄라에 유대인이 살았던 사실은 성도마와 같은 사람이 케랄라에 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같은 맥락으로 유대인이 있기 때문에 성 바돌로매가 히브리어 역 마태복음을 인도에 남겨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첸나이의 사이다페트 지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동굴은 성 도마가 적들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숨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밀라쁘르 전승에 후일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첸나이 근처의 성도마 교회에 있는 십자가는 적들이 성도마를 죽이려고 했을 때 끌어안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십자가의 정중앙에 있는 붉은 저은 성도마의 핏자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십자가가 페르시아 문화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 전문가는 이 십자가가 7세기 것임을 말한다. 거기다 십자가는 1세기에 경배의 대상물이지 않았다.


도마행전 이야기에 진실이 있는가? “이것의 대부분이 전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전부가 꾸며진 이야기인가? 아니면 저자가 이 열광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성도마가 인근에 와서 선교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 사실이 있었음에 틀림없을까?

군다프리스왕은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1834년 펀잡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한쪽에는 그의 초상을 다른 한쪽에는 팔리어가 쓰여진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1세기 또는 1세기 중엽 정도에 구석기때의 일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그의 통치가 꽤 길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석판 묘비(타키이 바히 암,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소재)는 그의 이름과 서기 46년으로 번역되는 일자를 표시하고 있는데 그의 통치 26년째 였다 가드(Gad)’란 이름이 새겨진 동전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동전이나 비석이 나타내는 기본적인 사실 위에 어떤 전승이 포함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능한 결론들

1. 최소한 4세기 중엽까지 성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 했다는 것이 크리스천 교회의 일반적인 신조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일반적 전승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2. 어떤 역사가들은 전적으로 그 전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성도마가 인도에 온 적이 있었다는 것 자체조차도 부인한다. 17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인 바드나지(개신교), 텔레몽(로마 카톨릭) 18세기 라 크로제(개신교), 19세기의 영국 개신교도인 제임스 휴, 포카예 경등이 그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1세기에 인도오 여행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3. 어떤이들은 성도마가 북인도를 방문하였다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남인도는 아니라고 부인한다. 밀네 래(G. Milne Rae)와 다흘만(Fr. J. Dahlmann)이 이 그룹의 대표다. 도마행전은 그들의 주장을 대변한다.


4. 시리아 크리스천 작가인 필립(E.M. Philip)과 다니엘(K.N. Daiel)은 열정적으로 남부 사도권을 변호하며 북인도 전승은 부인한다. 그들은 말라바르에 있는 실제 살고 있는시리아 크리스천들을 확고한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5.확정되지 않은 결론: 케아이(F.E. Keay)성도마의 남인도 방문은 확실하게 증명될 수 없다. 이 질문은 많은 논쟁을 거쳤고 최후의 판단을 내릴만한 작은 기대가 보인다. 그의 방문에 관련된 지역 전승은 매우 강하고 남인도 교회의 기원에 대한 라이벌 지역 전승이 없다. 이른 시기부터 이 전승은 인도 내부뿐만 아니라 서구와 동구권에서 지지되어 왔다. 그 사도가 인도같이 먼 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 만약 그 이야기가 증명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은 분명코 그 전승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말한다.


브라운(L.W. Brown)우리는 더 이상 그 사도가 남인도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의심할 나위가 없는 고대 기원의 크리스천의 존재가 그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고 1세기에 서구와 말라바르 해안 사이 상당한 상업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 동시대 유대인들의 주거지가 존했다는 것이 아마도 그 전승의 진실성의 합리적인 확률성이 있다고 믿는데 균형을 갖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상의 증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피력했다.


6. 성도마가 북인도와 남인도를 다 방문했다는 견해: “메들리코트(A.E. Medlycott)감독은 두 가지 별도의 여행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 하나는 육로로 팔레스타인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페르시아를 거쳐 파키스탄에 이르는 여행,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이집트, 이디오피아, 수코트라로 가서 아라비아해를 건너 말라바르에 이르는 길이다. 파르쿠하르(J.N. Farquhar)는 추가된 동쪽으로의 선교를 생각한다. 그는 성도마가 처음엔 펀잡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인더스 강까지 갔으나 쿠샨의 침입으로 그곳을 떠나야만 했고 그 침입은 그곳의 크리스천을 몰살하는 결과를 낳고 현재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후 성도마는 배로 인도를 떠나 수코트라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인도의 말라바르에 도착, 동해를 향하여 갔다. 파르쿠하르는 인도를 지나 중국이 아닌 벵골만을 지나 버어마까지 갔었고 다시 인도로 돌아온 말라바르에서 순교했다는 가능성까지 두었다. 헤라(Fr. Hera)의 견해는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데 도마가 소코트라를 향해 출발하기에 앞서 칼얀을 방문했고 버어마는 방문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퍼드(C.R. Firth)는 도마가 파키스탄과 남인도 둘다 방문한 사실이 불가능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의견이나 관점이 무엇이든 받아들여 할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도마의 무덤이 발견된 곳이 없고 어느 나라에서도 도마가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 이 시리즈는 인도 기독교사 책 몇권을 초벌 번역 재편집한 것입니다.

  저작권을 생각하셔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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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08.11 14:35:09
*.234.35.112

인도의 도마전승 주변에 에프라임도 등장하는 군요.

저는 말로만 이 마르 에프라임에 대해서 들었는데요.

대단한 찬송시 작가라고요. <솔로몬 송가>의 저자이기도 하고요.

 

선교사님 덕으로 인도 기독교 역사를 이렇게라도  훑게 되네요.

앞으로 더 관심있게 읽어 봐야 겠어요.

선교사님! 연작 해 주실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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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08.12 14:15:38
*.160.132.218

길거리 노점상은 손님이 없어도 판을 벌이듯이

이렇게 칼럼방에 문을 열어두었으니

손님이 있던 없던 계속 글을 올려야지요.

다만 이렇게 응원부대가 있으면

그것은 칼럼니스트들의 밥이 되지요.


주제별 인도기독교사는 주욱 계속될 겁니다.

제가 너무 설치는 것 같아서 좀 자제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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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9.08.17 16:47:10
*.210.174.47

인도 기독교의 기원.. 흥미롭습니다~

이 글들을 보니 도마가 인도로 갔을까? 아닐까?

참 헤매이게 되는군요^^

이런 여러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불가하다 하더라도

인도에 도마의 여러 이야기들이 퍼져 있는걸 보면

도마는 인도 어느 지역으로라도 복음을 전하러 갔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지 싶네요..

사따님,  더운 날씨에 무엇보다 건강 관리부터 잘하시고 ,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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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08.17 17:44:14
*.160.132.218

저별과 달님.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도마의 인도행 여부는

아마 성경의 기록방식(신명기사관 또는 복음서들)과 유사하지 않나 합니다.


잘 아는 현지 원로목사님 한분은 딱 잘라서 '도마는 인도에 오지 않았다'라고 하시더군요.

몇년전에는 그것이 궁금해서 직접 비행기를 타고 도마교회까지 날라가기도 했었지요.


관심가지시고 딱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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