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어느 반공포로의 죽음

인도의 길 조회 수 6024 추천 수 0 2010.05.01 15:35:36

4월 20일 월요일 아침, 뉴델리 천주교회 자매봉사단원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사들고 말비야 나가르에 위치한 최인철선생님댁을 방문했다. 최근 들어 거동이 부쩍 불편하시고 주일 미사에도 불참하신 터라 행여나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저어하는 마음에 자매들의 발걸음이 종종걸음이 되었다. 아니다 다를까 집에 도착하니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허겁지겁 문을 따고 들어가니 최선생님은 안방 침대 곁에서 두 다리를 곧추세운 채 잠자듯이 다소곳하게 누워 계셨다. 전기세를 아끼시느라 평소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불볕더위가 잠시 숨을 죽이는 밤이라도 35도가 넘는 옥탑방 침대에서 내려와 그나마 시원한 대리석 바닥에 누워서 주무시다 고령과 혈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의사가 내린 사망 원인이었다.

 

비록 국적이 인도인이었지만 반공포로로 인도에 와서 지난 인도생활 57년 중 21년을 대사관 현지 행정원으로 근무하시던 분이라 대사관에서는 즉시 담당영사와 직원을 보내서 사망원인을 알아보는 한편 혹시라도 한국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나온 결과는 인도에서 새롭게 맺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 외에는 사고무친이나 다름없었다.

45,6도를 넘나드는 북인도에서는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3일장, 5일장의 개념이 없다. 고인과 평소 친분이 있던 인도 지인들과 이 분을 음으로 양으로 돌보고 계시던 천주교회 성도들은 고인의 시신이 부패하기 전에 화장을 서둘러야 했다. 더운 날씨를 아랑곳 않고 부지런히 서둔 끝에 해가 넘어가기 전에 사켓 시티워크 몰 맞은편 동네 크리켓 익스텐션 한 가운데 위치한 화장장의 장작불에 불을 지필 수가 있었다. 1928년생이시니 한국 나이로 83세, 그야말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오신 최선생님께서는 인도 한인 제1세대의 한 분으로 눈에 띄지는 않게 조용히 살다 한 줌의 재로 소천하신 것이다.

이참에 인도 한인사회 1세대를 형성하였던 인도정착 다섯 분 반공포로, 특히 고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하게 인도 한인 사회의 뿌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지난 호 한인회 소식지에 한국 전쟁당시 활약했던 인도 육군의무부대 제 60 인도 야전 구급대의 역할이 실렸다. 이 뿐 아니라 네루 영도하의 인도는 중립국 소환위원회의 의장국으로 전쟁 후 포로들의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인도는 우리 한국에게는 고마운 나라이다. 특히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10만여명의 포로들 중 남한과 대만을 선택한 이들을 제외한 중공군 12명을 포함한 88명의 중립국 선택 포로들에게 있어 중립국 소환위원회 의장국 인도는 더더욱 그러하다. 비록 당시 중도노선을 걷고 있던 인도를 친공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권과 반공세력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지만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제3국을 선택한 한국인 76명(북한포로2명, 유엔포로 74명)과 중공군 12명을 포함한 총88명에게는 중립국 송환위원장의 나라 인도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1954년 2월 8일 마드라스(현 첸나이)항에 도착한 이들의 운명은 또다시 이념 때문에 남미파와 인도파로 나뉘어져 갈등을 겪다가 2년 후인 1956년 2월에야 정리가 되었다. 중공군 2명을 포함한 55명은 브라질로, 9명은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최종적으로 인도에 정착한 포로들은 포로의 리더격인 고 지기철회장을 비롯한 8분이었다. 이들 중 한 분은 1959년 11월 봄베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두 분은 대한민국정부의 설득으로 1960년에 대한민국에 귀화하였다. 결국 인도 땅에서 40여년 이상을 살아온 반공포로는 5명이었는데 그중 장기화선생님은 1990년대 중반 오토바이 사고로, 지기철 회장님은 1998년에 사망하였으며 남인도로 간 지신영선생님의 행방은 묘연하다. 생존해 계시던 반공포로는 현동화 회장님과 최인철 선생님이었는데 이번에 최선생님이 소천 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 지금은 현회장님 혼자 1세대 인도 한인사회 개척자로서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셨다.

이 분들의 인도를 비롯한 선택 동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영향으로 이념적으로 친공도 아닌 반공도 아닌 회색분자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념보다 더 심각한 개인문제들이 있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시작되는 제2의 인생을 미지의 세계에서 시작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선생님은 어떠했는가? 1983년 소설가 한수산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보면 이 분은 이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친공포로 막사시절에는 친공주의자의 명령에 따라 땅굴을 파고 반공포로 막사시절에는 탈출하려고 철조망을 기어오르다 실패하였지만 반공포로 석방시에는 반공국가에 속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분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물리적 정신적 자유였다. 북한의 사진동맹에서 일하다가 보병도 포병도 아닌 사진사로 인민군으로 차출되어 복역하다 포로가 된 이 분에게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정성들여 인화할 수 있는 자그마한 암실과 이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물질적 배경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는 분이었다. 미국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는 이 분의 소망도 결국은 이 작은 행복을 누리기 위한 것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이 분의 소망은 인도군의 육군 공보실에서 사진 작업을 하다가 인도문화공보부 임시직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얼마후 정식직원이 되어 20년간 꼬박 인도를 위해 근무하였다. 그래서 말년에 고인은 인도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용돈을 충당하셨다.

그러나 운명의 회오리바람은 이분의 작은 행복을 그냥 두지 않았다. 1978년 고 이범석 대사께서 지금의 대사관을 신축하고자 할 때 인도 인부들을 다루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한국 사람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인회 회장으로 한인사회의 든든한 지주가 되어 있던 고 지기철 회장님은 친분이 있는 고인에게 인도 공무원으로 사는 것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합당함을 설득하였다. 끝내 고인은 형님처럼 모시던 지회장님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기만의 삶을 조용히 꾸려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년도 보장되는 공무원 자리를 포기하고 대사관의 임시직으로 고용되었다. 그 후 허허벌판에 현재의 대사관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벽돌 하나하나를 검사하고 인부들을 감독하며 불철주야 전심전력으로 일했다.

1999년 8월말까지 대사관에서 네팔여인과 동거하며 근무했던 21년의 대사관 행정원 생활은 고되고 때론 서글프기도 했지만 보람이 있던 삶이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든 땀방울과 고 이범석 대사님과의 추억, 그리고 나날이 늘어가는 한국 교민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고국을 보는 기쁨은 타향에서의 삶이 결코 외롭지 않게 하였다. 자녀가 없는 이 분에게는 인도인 말리(정원사), 조끼다리(경비원), 운전수, 요리사들이 자식이었다.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왔다가 떠나는 외교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우미 역할을 하며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가신 최선생님의 그야말로 주한인도대사관의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의 삶이었다. 이 분의 그러한 검박하고 겸손한 삶은 이 분을 아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인도에 비해서 한국은 이분에게는 여전히 이방 땅이었다. 1993년 MBC의 초청으로 27명의 반공포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가 갈 수 있었던 곳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밖에 없었다. 그 장소를 배회하며 혹시라도 반공포로 시절에 잠시 인연을 맺었던 벼락치기 신부를 만날 기대를 했으리라.

한잔 얼근하시면 활동영화처럼 늘 풀어놓으시던 이야기가 인도 공보부에서 일하던 때 인디라 간디나 네루 등 저명인사의 사진을 찍어 인화하던 이야기며 대사관 짓던 때 생긴 갖가지 에피소드였다. 약주 그것도 인도 노동자들이 뜨거운 열풍 속에서 시달린 고달픈 육신을 쉽게 잠재우고자 마시는 싸구려 위스키를 즐겨 드셨던 고인은 대사관 직원이 서울 레스토랑에서 사간 동동주를 맛보시더니 이런 술은 태어나서 처음 마셔 보았다며 즐거워 하셨다고 한다. 간혹 명절이 되어 값비싼 양주를 들고 한 잔 마시자고 가면 그것은 고이 모셔두고 인도산 싸구려 양주를 맛있다며 내놓으실 때는 조금 섭섭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런 좋은 것은 꼭꼭 숨겨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에 선물로 가져다주셨다고 한다.

최근 들어 부쩍 치매기를 심하게 보이시긴 했다. 간만에 방문을 하면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사람을 못 알아보시고 누구시더라 해서 어리둥절해 하기도 한 것이 10개월 남짓 되었으니 그 기간 동안 카리타스, 안젤라, 데이빗, 알폰소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회 형제자매님들의 물심양면 음지의 헌신적인 봉사가 없었다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오시기가 힘드셨을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고 오직 화장터, 오직 화부인 선머슴아 하나가 긴 막대기를 들고 타고 있는 장작을 타닥거리며 소화(燒火)를 돕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다시 혼돈의 거리로 차를 몰고 나와 한없이 밀려드는 차량으로 인한 교통체증속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떠오르는 시가 있었다.  

DSC_3010.JPG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김춘수, 가을저녁의 시(詩)]

 

고인이 하늘의 부름을 받아 가신 후 일주일 지나 바산드꾼즈의 알폰소 성당에서 위령미사를 드렸다. 대사관에서는 직원들의 애도하는 마음을 담은 조그마한 백합화환을 민원담당 영사로 하여금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이 미사에 참여하여 대사관을 위하여 21년간 자신의 삶을 불사른 최선생님의 영혼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5.01 20:50:09
*.122.208.32

선교사님,

마치 제 눈에는, 저 장작불이 외로왔던 80평생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로 보이네요.

 

반공포로, 그들의 기구한 삶을 다시 되돌아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반공은 무엇이고 친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참 허탄한 생각이 듭니다.

선교사님 글을 읽다가, 혹시나 사망소식이 검색되나 했는데, 없군요.

참으로 익명의 어느 한 사람이 죽어갈 뿐이군요.

그들이 정령 자의에 의해서(설령 자의에 의해서였다 치더라도) 전쟁에 휘말려 든걸까요?

인간의 최소한의 좋아하는 일할 권리까지 빼앗아가는 이념이라는게,

얼마나 허탄한 것인지..

여기도 어제 천안함 희생자 장례식이 있었지요.

진심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0.05.02 09:40:29
*.177.184.161

저랑 이분은 1996년부터 2003년까지 7년을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때는 청소부, 정원사, 운전수, 경비, 시설관리인까지

전부 대사관 식구들이었죠. 지금은 대부분 용역으로 주었지만.

그 대식구를 거느리는 것이 총무과에 계시던 이 분의 임무였지요.

봉급날 봉투에 봉급을 담아 나누어 주면서

이들의 봉급작다고 툴툴 대는 소리를 다 감당하기도 하셨구요.

 

우리의 뿌리를 잠시 돌이켜 보았습니다.

인도형 빨치산, 낙살라이트의 처절한 투쟁도 같이 떠오르네요.

지난달 토벌대를 몰살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인도 정부는 비행기도 사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네요.

그 무차별 토벌에 따를 애꿎은 생명의 희생과

아작날 밀림들이 눈앞에 뻔히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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