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제4장 파키스탄 생성의 배경

스탠리 존스 조회 수 4684 추천 수 0 2010.06.19 20:50:51

나는 차라리 이 장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되기 직전 나와 진나 사이에 있었던 서신왕래와 대화를 출판을 권면한 마하트마가 떠올랐다. 나는 그의 생전에는 이 일을 미루어 왔다. 그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명백히 설명해 줄 것이다. 간디의 생전에는 그의 권고를 무시할 수 있었으나 그가 순교를 당한 이 즈음에 이것을 쉽사리 일축해 버릴 수 없었다. 그의 권고는 그가 살아있을 때는 권고에 지나지 않았으나 죽은 지금에는 명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간디의 권고 때문이라고 말하기보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다. 파키스탄의 ‘팍’은 거룩함, 순수함을 의미하고 ‘스탄’은 장소를 의미하여 결국 파키스탄이란 의미는 ‘거룩한 땅’, 즉 이슬람의 거룩한 땅이란 의미를 갖는다. 내가 그 말과 아이디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12년 전인가 15년 전인가 라호르의 유명한 무슬림 시인이자 철학자인 모하마드 익발의 집에서였다. 그 자리에는 모로코의 왕자를 포함한 영향력이 있는 무슬림 그룹이 배석했다. 그들이 파키스탄이란 나라의 형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당신들이 정녕 그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지 않소? 그렇죠?” 그들은 나에게 그들이 그렇게 할 거라고 했고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구체화되었다.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곳에 무슬림나라를 세운다는 종교에 근거를 두고 인도를 둘로 나눈다는 그런 생각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광신적인 것으로 보였다. 인도는 하나였고 외관은 달라보여도 인도인은 한 민족이었다.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나였다. 이런 방식으로 나라를 나눈다는 것을 생각하니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분리 후 인도에 남을 4천만의 무슬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환멸감 외에 파키스탄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인질이 될 것이 뻔했다. 무슬림을 이끌던 미르자 이스마일경은 “파키스탄은 인도를 아프게 한 것보다 더 인도에 있는 4천만 무슬림들을 더 아프게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견은 무력한 것이었다. 융통성이 없는 목적을 지닌 진나(M.A. Jinnah)의 진두지휘로 이 아이디어와 활동이 성장했다.

무슬림들은 힌두가 대다수인 인도에서 소수로 살기 싫다고 말했다. 그들은 영국 집권이전에 인도 지역 대부분의 통치자였던 자신들을 상기했다. 그러한 통치자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은 힌두들의 다스림을 거부하게 했다. 게다가 그들은 힌두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민주주의를 실시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인도 정부의 태동부터 이 두려움의 근거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1937년 지방 자치정부가 들어서면서 아르야 사마즈와 마하사바로 대표되는 국민회의 하원의원들의 다수로 구성되는 새로운 인도 정부가 다수의 힌두들로 구성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것을 국민회의 지도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하원의원내의 오해와 종종 미숙함 때문에 비롯되었다. 어떤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지 알지 못한 채 실수들이 계속되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라마 라즈’ 즉 라마 왕국의 도래를 언급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라마는 신격화된 고대 힌두왕자였다. 그의 아내 시따는 이상적인 인도 여인상이다. 마하트마가 자신도 깨닫지 못한 결과를 야기하게 될 ‘라마 라즈’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말한 것은 실수였다. 나는 힌두이즘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에 마하트마가 혁신된 힌두이즘의 목표로서 사회질서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고 생각된다. 그의 추종자의 그룹이 그에게 라마 라즈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나는 발미키나 툴시 다스의 라마 라즈를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질서의 종류, 즉 ‘간디 라즈’를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하자 그는 강조하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말하는 바는 당신네들이 말하는 천국의 의미와 정확히 동일하다.” 그러나 그 설명은 결코 그 이름이 의도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간디는 고대 힌두 국가를 회복하기 위하여 기를 쓰고 있다는 식으로 무슬림에게 느껴졌다. 최소한 그들은 그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실수였다. 그것은 반목을 불러 일으켰고 백해무익이 되고 말았다.

독립 투쟁을 하는 동안에 사용된 애국가인 ‘반데 마타람’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또 다른 실수가 생겨났다. ‘반데 마타람’은 ‘우리나라 만세’라는 의미이며 비록 몇 줄이 우상숭배를 의미하더라도 특별히 부적당하지는 않았다. 또 이것은 반킴 찬드라 차떠르지의 소설에 등장하는 힌두 사두들이 무슬림 정복자들과 싸울 때 전장에서 외치던 ‘반데 마타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대다수의 힌두들이 그 출처를 모른 채 이를 사용했다. 그러나 무슬림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라마 라즈’와 ‘반데 마타람’을 사용한 것이 실수였으나 미숙함이 낳은 실수일 뿐이었다. 인도 독립 투쟁 기간 동안 라마 라즈나 반데 마타람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지금은 둘 다 퇴출될 것이다. ‘라마 라즈’는 결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별 의미도 없었다. 인도는 평등주의자 원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찾고 있었다. 인도 초벌 헌법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인도의 국민은 인도를 ‘엄정 민주 공화’로 규정하는 것을 진지하게 결정하고 법, 사회, 경제, 정치, 생각의 자유, 표현, 신앙, 신조와 경배, 지위와 기회의 평등, 개개인의 존엄성을 확신하고 시민 사이의 동포애를 촉진하며 국가의 연합을 도모한다…”

이것은 명백하며 알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도는 지금 모두에게 감명을 주고 신조가 될 만한 적절한 애국가를 찾고 있으나 아직 선택된 것은 없다.

파키스탄 분리에 대한 요구의 조류는 거의 광란에서 시작되었다. 파키스탄은 무슬림에게 약속된 땅 즉 이슬람 문화와 종교가 안전하고 무슬림법인 ‘사리야뜨’가 나라의 기초가 되는 땅으로 그려졌다. 파키스탄에 반대하는 자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1946년 영국 내각 사절단이 인도에 있을 때 나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진나를 설득하도록 한 내용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제안하기를 첫째, 국민회의는 다음과 같이 함으로서 파키스탄을 인정하고 그것을 시행토록 진행하라. 1) 인도 헌법위원회와 파키스탄 헌법 위원회가 동시에 만나서 대표되는 법안을 만들 것, 2) 그것을 가지고 만나서 연정을 수행해 나갈 것, 둘째, 파키스탄과 인도는 연방 국가의 형태를 갖되 파키스탄의 그 연방의 한 부분인 주로 독립할 것 등을 썼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 편지를 주의 깊게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각하였다.

“국민회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파키스탄을 인정하는 것은 죄악이요.”

나는 어떠하든 나라가 하나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파키스탄이란 나라를 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고 잘못된 일이나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것과 동일하게 이런 ‘죄악’도 쓰실 것이라고 말했다. 마하트마가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 당신이 그 일을 죄악이라고 인정하는데 놀랐소.”

나는 내가 파키스탄이 죄악이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연방이라도 이룸으로서 나라가 나눠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하트마는 요지부동이었고 나는 패배감을 갖고 떠났다. 나올 때에 인도 동료는 “그는 당신이 잘못이라고 만드는데 성공했소.”라고 말했다.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 문 앞에 있던 젊은이들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선생님. 제발 인도를 떠나주세요.” 이것은 처음이자 단 한번 내가 들은 것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율이 발끝까지 이른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영국인 추방운동(Quit India Movement)”의 잔재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결사적으로 인도를 나눠지지 않게 몸부림쳤고 나의 제안에 대한 그의 반응도 그것의 일부였다. 그 무렵 그는 파키스탄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나의 제안에 대한 라자고팔라차리의 반응이 흥미롭다.

“우리 국민회의는 다른 방도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연합과 그리고 그 연합하의 파키스탄이지요. 당신은 선교사이시고 또 점진적인 개종을 사용하시니 파키스탄에서 시작하셔서 종국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보시지요.”

그런 후 해가 바뀌고 파키스탄 동요는 국민회의 지도자들로서도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폭동과 긴장을 조장했다. 나는 분리가 결정되기 직전 1947년 4월에 진나를 보았다. 내가 방안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일어나지 않고 나더러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그의 태도는 그가 이끌 나라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하나로 유지하도록 간청했다. 내가 비록 미국 남부 출신이지만 만약 우리가 이겨서 나라가 두개로 나뉘어졌다면 그것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한 민족임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했다. 나는 유타주가 다른 종교를 가진 주이면서도 미연방에 소속된 것처럼 파키스탄도 연방의 한 주로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지킬 수 있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유타주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파키스탄도 인도 연방정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유타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1억이란 말이요.”

그래서 나는 “만약 국민회의가 파키스탄을 승인한다면 인도의 남은 부분과 함께 인도 연방에 들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힌두와 국민회의에 대한 길고 장황한 신랄한 비난을 퍼부어 대었고 나는 낙심했다. 나는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절감했다. 과거에 나는 분리가 온다면 경제적인 이유로 보수과 진보사이의 분리가 올 것이지 결코 종교적으로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힌두, 무슬림, 시크와 기독교인이 한 편이 되고 급진적 힌두, 무슬림, 시크와 기독교인이 다른 편이 될 것이고 이것은 좋은 의미로서의 분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기존 가치를 보수하기를 원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위한 변혁을 시도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머물기를 원하는 보수와 전진하기를 원하는 급진 사이에서 우리는 중도 방향으로 진행방향을 설정하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힌두와 무슬림은 경제적으로 협력할 수 없는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나와 마하트마 간디가 서로 다른 법아래 살아왔다는 것을 아시오? 마하트마는 힌두법 아래 살아왔고 나는 무슬림 법아래 살아왔소.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요. 예를 들면, 만약 무슬림이 죽으면 그의 재산은 이슬람법에 따라 나눠지오. 그는 유서를 만들 수 없소. 힌두는 유서를 만들 수 있소. 만약 무슬림 사업가가 죽어 가족의 누군가가 정리를 원한다면 그 사업은 경매에 붙여지게 되고 힌두는 그것에 값을 매기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힌두들에게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거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소이다.”

그런 후 그는 갑자기 멈추더니 담배로 손을 뻗고 그의 태도는 바뀌어졌다.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따른 다면 당신의 제안은 순진하기 그지없소. (그는 자신이 내가 제안한 어느 것이라도 받아들이기 전에 나의 위치에 서보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국민회의가 파키스탄을 승인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남은 인도와 함께 인도 연방으로 들어 갈 것이라고 말할 것이요.”

“정말이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이구 말구요.” 대답했다.

자, 이것이 바로 인도가 듣기를 원했던 뉴스였다! 이것은 나의 숨을 멈추게 했다. 내가 떠날 때 말했다. “이것에 대한 국민회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소. 그러나 나는 그들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소.” 우리는 우정 어린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토를 달아 특별 전령으로 총독에게 진나의 진술에 대한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 나는 그것을 국민회의 의장인 아챠르야 크리팔라니에게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회의가 파키스탄을 인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소. 우리는 지쳐 있소. 우리는 파키스탄을 연방으로 들어오든 안 오든 승인할 것이요. 진나에게 가셔서 이 사실을 서면으로 받아 오실 수 있을는지요?”

나는 이것을 발라바이 파텔에게 건넸고 자와할랄 네루에게도 주었다. 그들은 회의적이었다. “어디엔가 함정이 있을 것이겠지만 그러나 합의서가 있다면 증명이 되겠지요.” 네루가 말했다.

발라바이 파텔은 더욱 회의적이었다. “인도의 나머지 부분과 연방에 들어가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설마 인도의 다른 자치국들과 조약을 맺는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방에 대해 이야기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진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대화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만약 국민회의가 파키스탄을 승인한다면 당신은 기꺼이 인도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연방아래 들어가겠노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것을 연방 국가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맞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의 말을 송두리째 뒤집어 내가 자기를 아주 오해하였다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인도를 나누지 않고 문제가 정리될 것이라는 소망을 불러 일으켰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는 편지를 다시 보내야 했다. 나는 편지를 이렇게 맺음 했다. “당신의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나의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한 사람의 답변은 아주 직선적이었다. “당신의 편지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 사실을 예견하였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또 다른 국가 지도자도 대답하였다. “나는 당신의 두 번째 편지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현재 인도 정부 대표로 있는 라자고팔라차리는 “당신이 그런 말을 듣기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들었을 거요.”라고 말하며 내가 진나를 오해했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대화가운데 다른 사람을 오해하기는 쉽지요. 또 내가 원하고자 하는 바대로 듣기도 쉽겠지요. 그런데 사람의 팔을 잡고 ‘정말이요?’ 묻고 ‘정말이고말고요.’라고 까지 한 일을 오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한 일입니다.” 그러면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진나가 이것을 나에게 말했을 때는 그의 기분이 최고로 좋은 상태여서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사실이었다. 그는 진실로 파키스탄이 연방정부아래 들어가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서신으로 보냈을 때 이것은 비서의 손을 거치고 세상 만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파키스탄의 타협할 수 없는 수호자로서 인도와 거래를 하도록 준비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자신을 깨달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 없다고 느끼고 거부의 편지를 씀으로서 모든 일을 무산시켰다. 나는 내가 그를 오해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진정한 진나의 모습으로 인도의 분리자가 아닌 합병자로 역사에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혀 반대의 내용이 담긴 편지에서 나는 두 사람의 진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엄격하고 굽힐 줄 모르는 율법적인 오만한 진나가 있는 반면 남의 의견을 청종하고 친밀감이 있으며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하는 진나가 있었다. 이 두 번째 진나가 바로 대화의 마지막에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자신을 철회시키고 은폐해 버렸다.

내가 진나를 만나기 바로 전에 파키스탄의 수상이자 과도정부의 재무상이었던 리아콰트 알리 칸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미국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의 인도를 만들기 위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간청을 하였다. 나는 개인의 삶에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 시절과 독립하는 청소년 시기, 그리고 상호 의존하는 어른, 성숙의 시기 등 3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국가도 동일한 3단계, 즉 의존하는 제국주의, 국가 자유를 위한 국면인 독립단계와 마지막으로 성숙된 단계인 세계 정부로서의 3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연방정부’를 믿는다고 말했다. 거기에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그렇게 멀지 않군요. 왜냐하면 나 또한 세계 연방 정부를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만약 세계 연방 정부를 믿는 다면 왜 연방 정부를 인도에서 시작해 보지 않으시려는지요?” 그는 대답했다. “맞아요. 그러나 우리는 먼저 독립의 단계를 먼저 거쳐야만 합니다.” 그가 불렀던 “나의 고상한 노력들”과 “나의 고상한 감정”에 대해 나에게 감사를 표명했다. 나는 그가 진나보다는 훨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돌아왔다.

나는 그 인터뷰들의 어둠속에서 단지 두 가지 가냘픈 빛을 보았으나 그것마저 환상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그러나 진나나 리아콰트 알리 칸 둘 다 인도와의 궁극적 연합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진나는 이것을 피력했고 그런 다음 뒤집었다. 그러나 그 빛은 거기에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장래에 가능성을 던져 줄 것 같은 어떤 희미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아콰트 알리 칸은 연방의 가능성을 피력했으나 독립의 단계를 먼저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매우 가냘픈 소망의 빛이었고 그것들 역시 기대만으로 드러날 것이고 결국 환상이었다. 그러나 다시 그것은 견고한 필요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두 민족은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소속되어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그들은 한 민족이었다.

나는 파키스탄이 인도의 연방에 소속되지 않고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에 남서쪽 극단의 부분(서파키스탄-역자주)이 있고 또 다른 한 부분은 동쪽 극단(동파키스탄, 현재 방글라데시)에 위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연결회랑은 없었다. 그들은 1200마일 떨어진 외국이었다. 국경선에 설치된 관세장벽으로 인해 무역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연방 내부 무역은 자유롭고 자연적이 될 수 있으며 각각 그 생산품에 대한 드넓은 시장이 있었다. 재무적으로 파키스탄은 가능성보다 문제가 많았다. 파키스탄은 간디의 금식으로 지원된 5억5천만 루피로 살아가고 있다. 대내적으로 하나가 된 인도로부터 불어 닥치는 경제적 압력이 있다.

그리고 커다란 또 다른 압박은 인도에 살고 있는 4천만 무슬림들이었다. 이것은 파키스탄의 6천만에 맞먹은 커다란 단체였다. 그들은 삶의 근거지가 인도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파키스탄에 가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기에 인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환상에 젖은 파키스탄으로부터 인도로 다시 돌아왔다. 인도를 향해 하이데라바드, 신드를 출발하는 승객의 1/3은 파키스탄의 힌두 난민이었고 2/3가 환상에서 깨어나 인도로 돌아가는 무슬림들이었다. 심지어 내가 파키스탄이 생겨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처음들은 모하메드 익발이 후에 에드워드 톰손에게 말했다. “그는 무슬림 연맹 회합의 의장의 자격으로서 그의 위치 때문에 파키스탄을 옹호해 왔지요. 그러나 그는 분명히 파키스탄이 인도 전체와 특별히 무슬림을 상하게 할 것을 느꼈어요.”1) 인도 내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의 생성으로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서 파키스탄의 거의 모든 힌두와 시크가 분리를 기점으로 인도로 와야 했으나 4천만의 무슬림은 인도에 남았다. 그들은 지도자도 없이 파키스탄의 후원자로부터 단절된 인질들이었다. 북인도의 열차의 한 칸은 앞에다 종종 “소수자를 위한 칸”이라는 표시가 되어 군인의 경호를 받았다. 그 “소수자”란 바로 무슬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사라질 것이고 이 예약된 객실은 폐지될 것이나 이 사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6천만의 조국을 만들기 위하여 4천만의 무슬림은 거처를 잃어 버렸다. 그 자체가 손해 보는 거래였다. 물론 이 4천만이 머물 곳을 잃어 버렸다는 말이 정확히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들은 인도에 귀속함으로 조국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연방국 인도에 합쳐지도록 파키스탄에 압력을 가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파키스탄이 연방제 인도에 연합한다면 그때는 더 이상 인도에 사는 이 무슬림들은 지도자 없이 영향력을 상실한 무리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하여 파키스탄은 연방 정부로부터 자신들이 필요한 유익을 다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 서 파키스탄 사이에 끼어든 외국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파키스탄은 자유 시장을 갖게 될 것이다. 인도의 방대한 자원이 파키스탄에게 개방되고 세계 종족 1/5을 차지하는 인도의 매우 영향력 있는 부분으로서 그 성장과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파키스탄은 무슬림 법인 샤리야에 기초를 둔 정부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20세기에 신정주의에 기초를 둔 6세기의 정부를 이루고 하면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들의 성장하는 의지가 법을 꺾거나 그 법이 사람들을 꺾을 것이다. 이슬람법은 다스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지 원칙은 아니다. 당신은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나 규칙은 벗어날 수 있다. “이슬람은 사막을 발견하거나 또 다른 사막을 만든다.” 나는 6세기 샤리아법에 기초를 둔 파키스탄이 또 다른 하나의 나라를 건립한다는 것이 두렵다. 자와할랄 네루가 알리가르 대학 좌담 연설에서 말했다. “6세기 개념에 바탕을 둔 신정주의를 시도한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리는 퇴보다.”

파키스탄은 샤리야트에 기반을 둔 신정주의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를 버려야만 한다. 그 대신에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고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세속적 국가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분리주의자의 발걸음을 돌이켜 인도 연방 정부로 돌아옴으로서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인도에 남아 있는 4천만 무슬림을 구원해야 한다. 또 다시 파키스탄은 ‘죄악’라고 결정한 마하트마는 옳았다. 왜냐하면 파키스탄은 분리함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낙심 시킨 죄, 수백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 산천을 떠나 낯설고 물 선 타향 땅에 살게 한 죄, 근본적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방해한 죄, 파키스탄이란 거짓된 소망을 4천만의 무슬림의 가슴에 심고 결국엔 환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죄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키스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적 사악함이다. 무슬림 연맹소속 무슬림들은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한 일이 미미하거나 전혀 한 것이 없다. 인도의 독립은 많은 무슬림 독립주의자를 포함한 인도국민회의의 오랜 투쟁의 결산이었다. 그런데 무슬림 연맹은 독립 투쟁이 거의 끝날 즈음에 뛰어 들어 가당치도 않게 파키스탄이라는 부당 이익을 불로소득을 요구했다. 나는 처음 간디가 파키스탄에 대해 ‘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무척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간디가 그 상황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용어를 썼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간디가 무슬림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델리 금식에서 그들에 대한 간디의 심정이 피력되었다. 사실 그는 인도에 남은 4천만의 무슬림들이 인도 내에서의 동등한 지위를 보장 받도록 하는 그 제단위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는 파키스탄이 불신에서 잉태되어 두려움 가운데서 태어나 증오 가운데서 양육된 죄악임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죄인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었다. 바로 그가 영국의 제국주의를 ‘사탄’이라고 불렀으나 영국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호의를 가졌던 것처럼 동일하게 파키스탄은 사악하였다고 느꼈으나 무슬림들을 사랑했고 심지어 그들이 사악하게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죽고자 금식을 결행했다.

어느 날 그 쓰라림이 가라앉을 때 무슬림들은 마하트마가 옳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도 연방국가 체제로 돌아옴으로 인도를 고통스럽게 한 잘못을 속죄할 것이다. 그때 마하트마의 투쟁과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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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0.06.20 01:41:24
*.235.166.155

사땨님~ 파키스탄의 생성에 대하여 잘 읽었습니다.

간디의 강력한 의견이 있었으나 인도가 무슬림을 안고 가기에는

너무나 큰 종기였을 것 같습니다.

영국 식민지의 압력이 걷어지자 내부의 눌렸던 다른 힘이 분출된 것으로 보이는군요.

파키스탄은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의 국가로 알고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도 인도 내부의 무슬림 문제가 있지만,

파키스탄 분리 이전부터 진행 중이던 카쉬미르 분쟁과 같은 

계속적이고 산발적인 종교간의 문제가 인도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영토의 크기로 보나 정치, 행정력으로 보나 분리도 민족적 관점만 아니라면

효율적인 것 같아 보이는군요.

그러나 간디의 넓은 가슴은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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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6.20 06:14:45
*.177.226.171

유니스님.

긴 글을 읽으셨군요.

역사가들은 인도내 힌두와 무슬림의 종교분쟁을  영국의 분리통치의 영향으로 봅니다.

물론 진나를 비롯한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의 헤게모니 장악에 대한 욕심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힌두 다수의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서

용의 꼬리가 될 지언정 닭의 머리가 되겠다.(비유가 좀 그러네요.)

그런 의도로 분리에 따른 출혈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그렇게 몰아 부쳤고 그 결과 오늘의 인도 파키스탄이 나왔지요.

 

스탠리 존스 목사님의 연방제로 가는 것이 훨씬 좋았을텐데 하는 미련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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