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인간 간디

인도의 길 조회 수 6029 추천 수 0 2010.12.04 21:27:22

간디는 그의 자서전의 제목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로 붙였다. 그가 생의 마지막 144일을 살았던 제뉴어리 띠스 마르그에 위치한 간디 스므릿띠(간디 기념관)을 방문하면 어린 아이 둘을 안고 있는 간디 동상을 볼 수 있다. 그 발아래 쓰인 글이 오고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메리 지반히 메라 산데쉬헤” 힌디 겐드리아 산스탄, 인도 교육부산하 기관 힌디어학원의 엑소 클라스(100반, 1학년)을 다닌 한국 사람들은 금방 이 말이 무엇인가를 해석해낼 수 있다. “나의 삶이 바로 나의 편지입니다.” 이것은 직역이고 의역을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나의 삶을 보면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아실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진리를 실천하는데 쏟아 부었던 간디의 생애를 촌철살인으로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간디의 위대성을 다시 이 자리에서 리바이벌하는 것은 지면 낭비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다 아는 사실은 생략 또는 요약하고 넘어가자. 간디가 일생동안 한 실험이 한 둘인가. 이 글이 교양을 위한 글도 아니고 쥐꼬리만큼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며 오직 필자의 눈을 통해 보인 간디에 대한 이해를 같이 나눠보고자 하는 작은 시도일 뿐이니 복잡하고 지난한 그의 실험이야기를 현대 젊은이 좋아하는 요약집, 다이제스트로 풀어 보고자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함석헌 선생님의 간디 자서전 번역본이나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인도하면 마하트마 간디를 떠올린다. 이들은 간디가 팍스 브리태니카(대영제국하의 평화) 치하의 식민국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해 ‘진리를 알고 이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진리파지, 사탸그라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인 비폭력, 아힘사를 일생동안 실천하여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다. 인간의 갈등을 비폭력, 금식을 통한 자기희생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그의 시도는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것이 좀 지나쳐 간디의 아우라를 자신의 야심 성취의 도구로 이용하는 이들이 생기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간디의 진리에 대한 작은 깨달음과 그의 실천이 가져온 그 막대한 힘이 그런 얍삽한 정치꾼들로 인해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간디의 대략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간디가 깨달은 진리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서전에서 그가 읽은 책들, 영향을 받은 이들과 책들을 나열하고 있다. 톨스토이, 러스킨, 바그와드 기따 그리고 선교사 친구들이 소개해준 성경과 그에 관련된 서적들이 간디의 사상형성에 근간이 되는 책들이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로는 그가 그런 책들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는 각자의 사물속에 내재된 작은 빛, 피조된 피조물의 의미가 사랑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랑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창조주의 창조 소감을 “그가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그들의 성전(聖典) 창세기에 기록했다. 진리를 추구해 가는 간디가 보았을 때도 세상 만물, 특히 인간은 모두가 자기 나름의 창조 의미를 가진 귀한 존재들이었다. 마치 북인도 최대의 축제 디왈리때 각 집마다 담벼락이나 계단 또는 집안 구석구석에 오롯이 타오르는 디와처럼 각자의 삶속에는 창조주의 숨기운이 있었다. 수 천, 수만 개의 디와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사람 저마다도 다 다른 모습으로 생명의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창조주의 사랑의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은 진리였다. 이 진리의 빛은 다 창조주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더 못나거나 한 것이 없었다. 모두 다 평등하고 고귀했다. 이때 간디는 35세의 고타마 싯달타가 12월 8일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각의 도를 깨친 것처럼 하나 하나의 진리가 합쳐서 부르는 장엄한 우주의 합창을 듣고 법열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을 뜬 그가 바라보는 세상, 현실은 전혀 달랐다. 조국 인도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수탈아래 신음하고 같은 인도인들끼리도 가진 자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못 가진 자의 생명을 압제하고 있었다.  간디는 각자가 갖고 있는 진리의 빛을 드러내면 세상의 모든 어두움, 비폭력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근본적으로 독실한 힌두 신자였던 어머니를 두었던 그는 그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방법을 힌두교의 수행자들의 모습에서 찾았다. 모든 욕망에 대한 절제와 경건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그것을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이루어 나가고자 하였다. 남아의 톨스토이 농장, 아메다바드의 사바르마띠 아쉬람, 마하라슈트라의 세바그람 아쉬람, 그리고 델리의 부호 비를라가 자기 별장을 휴식처로 제공해준 델리의 숙소는 간디가 평생에 이루고자 했던 진리 구현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내면의 진리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들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비폭력으로 파괴된 현장을 돌아보기도 하고 소금전매법에 맞서서 24일 동안 아메다바드에서 단디해변까지 390 Km를 걸으면서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함께 하던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투옥되어 이들을 둘 장소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건과 환경이 주어질 때마다 현장에 나서기도 하고 때론 금식으로 때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긴 명상으로 진리의 소리를 듣고자 애를 썼다. 무엇이 이 상황 가운데서 진정한 사랑이고 진리며 생명을 살리는 길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다 확신이 서면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지고 자기 갈 길을 갔다. 그러다 보니 독립도 맞이하고 그리고 암살로 진리 수행의 길을 마감하였다.

간디에 대한 책과 사람들의 평들은 대충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훌륭하다. 역시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이라 불릴만하다고 감탄하며 이런 위인을 배출해낸 인도에 뭔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여행도 오고 자녀들 유학도 많이 보낸다. 그러나 이런 마무리를 짓고자 하는 필자에게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대학원 1학기 정치사회학과 시간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일까? 중간고사가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연구발표를 하는 것으로 대치되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한 여학생이 간디의 괴팍한 여성관에 대해서 열을 올리며 비판을 가했다. 영어 수업을 간신히 따라가던 시절이라 그 내용을 상세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간디에 대한 비판만은 분명하였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발표를 들은 교수가 발표에 대한 논평을 시작하면서 안색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냉철하던 그 교수는 여학생의 발언을 철저한 페미니스트로 믿고 있는 간디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고 여학생에게 읽을 책 몇 권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다 읽고 다시 이야기하자면서 수업을 마치고 휑하게 교실을 나갔다.


교수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간디의 괴팍한 여성행각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드러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그 여학생은 독신주의를 표방한 간디의 여성편력에 대해 회의를 품었음에 틀림없다. 13세에 한 살 연상인 카스투르바와 결혼한 간디는 아버지의 초상을 치루는 그날 밤 아내를 찾을 정도로 왕성한 성욕을 가진 정상적인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30대 중반 4번이나 거절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남은 생애 독신주의자, 브라마차리로 살 것을 선포한다. 결혼했지만 부부관계를 갖지 않으므로 총각으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며 불교의 승려도 있으니 결혼만 했다면 그의 선언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이미 아프리카에 있을 때 변호사란 직업 때문에 수많은 지성적인 여성들에 둘러싸여 살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 십수명 이상의 여인 중 가까이 지냈던 6명의 서구에서 온 여인들이 있었다. 그래함 폴락, 닐라 크램 쿡, 마델리네 슬래이드(미라 벤), 마가렛 스피에젤, 손자 쉘신, 에스더 패링이었고 인도 여인들은 스리마띠 프라바바띠 데비(자이프라카쉬 나라인의 아내), 칸찬 샤, 그레마 벤 칸탁, 수실라 나이르(파레랄의 누이), 마누 간디(증조카 조이수크 랄 간디의 아내), 아바 간디와 사랄데비 초드리였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조카이기도 했던 사랄데비와는 성관계까지 발전했던 것을 간디 자신도 고백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나 그 관계는 간디의 정착을 송두리채 흔들만큼 큰 것이었기에 간디는 눈물을 머금고 사랄데비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인도로 돌아와서도 수백 통의 연서를 교환한 여인도 있으니 그의 독신주의자 선언이 그를 아는 이들의 눈에 순수하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이미 세 아들을 가진 일자무식의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마음이 떠나버렸다고 보면 너무 간디를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 하여튼 간디의 그런 선언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더구나 그런 그의 선언이 자신의 부적절한 성행각이 드러나자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나중에 그의 측근에 의해 밝혀졌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사바르마띠 아쉬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여인들과 처음에는 나체로 같은 방을 쓰다가 한 침대를 쓰자 충격을 받고 간디를 따르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간디는 그런 자신의 행위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여인과 나체로 한 침대를 쓰면서 자신의 성욕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그가 출판하는 원고에 7차례나 기고를 했다. 67살이 되던 해 몽정을 했다고도 한 그의 기록은 그 나이가 되도록 넘치는 성욕에 시달리며 고통했던 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한편 그와 함께 한 여인들 사이의 질투와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여인으로서의 고통은 간디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시바신과 같은 중성으로서 여인들에게 자신은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생각하라 이야기하면서 나름의 독신주의 원칙을 세우고 나체로 침대를 같이 썼지만 함께 하는 여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자이 프라카쉬의 아내였던 프라바바띠는 간디가 없으면 잠시도 안정을 취하지 못하던 여인이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던 그 순간만이 간디의 아내가 간디를 만날 수 있었고 프라바바띠가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1938년, 쁘레마 벤 칸탁은 ‘프라사드와 딕샤’란 책에다 그와 간디와의 성관계를 폭로하여 한때 마하라슈트라주를 떠들석하게 하였다. 이 모든 사실과 죽는 날까지 증조카의 아내와 나체로 피부를 접하며 잠을 잤던 간디를 자료를 통해, 사람을 통해 들은 그 여학생이 받은 충격은 어떠했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교수가 간디는 위대한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니 꼭지가 돌만한 일이었다. 지금 그 여학생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야기 나온 김에 한가지 만 더 짚고 넘어가자. 역시 그때 대학원 시절이야기였다. 공통 대화가 간디밖에 없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간디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질색하는 오릿싸 친구가 있었다. 불가촉천민에게 지정카스트 제도를 마련해줘서 출세의 기회를 준 간디가 고맙지 않느냐고 하자 그 친구는 그 간디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아직도 카스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간디와 맞서 인도 천민들을 카스트의 굴레에서 독립시켜 인간답게 살게 하려던 그들의 지도자 암베드카르는 철저한 힌두이자 카스트 옹호자였던 간디와 첨예하게 부딪치게 된다. 간디로서는 대영제국에 맞서 인도 독립이라는 거대한 목적을 앞에 두고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죽음으로 막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오울드 델리에서 화장실을 직접 청소하고 천민들을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하리잔으로 부르며 애정을 표시하고 글도 많이 썼지만 그것은 카스트 제도를 고수하는 한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카스트 제도를 천부적인 제도라고 찬양하였다. 부잣집 아들로 고이 자라 영국 유학을 다녀온 그가 짐승이하의 취급을 받는 불가촉천민들을 뿌리부터 이해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인도 독립이라는 거국적 목적이 시급했던 그 시기였으니 2주간의 금식으로 죽음의 신이 눈앞에 아른댈 지경에 이르기까지 카스트 제도를 고수했을 것이다. 그런 간디때문에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카스트의 족쇄에 매여 살아가는 이들에게 간디는 고마우신 분이 아닌 원수도 이만한 원수가 없는 것이다.


마하트마로,  돈에 그려져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간디의 또 다른 모습, 그가 시도했던 실험의 실패한 결과들을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 특히 진리로 믿은 비폭력으로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을 막아보고자 하다가 생전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조국이 갈리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그의 참담함,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던 기본적인 욕구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간디는 진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그도 결국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깨달음의 문턱에 들어서서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살았지만 위대한 힌두가 보여준 힌두의 한계를 생각하며 인도, 인도인의 정체에 대해 다시금 모호해지는 아침이다. 


[레벨:12]진 예수만

2010.12.04 21:42:28
*.118.18.237

주신 글 덕분에, '인간의 본질 / 한계' 그리고 '포장된 지성'의 내면

같은 그런 것에 관해서 더 소상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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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12.05 11:11:32
*.177.161.188

함께 계신 인도생활 12년차 선교사 한 분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영웅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웅을 보통 인간과 다른 영웅으로 보기보다

처절하게 살다 간 한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할 뿐입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던 인도 사람들에겐 누군가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간디를 주목했고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서 좋은 것만 보기시작하고

그렇지않은 것들을 걍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사실이 아닌 것을 덧대다 보면

코로 숨쉬는 사람도 Hero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되어 나중에 교과서에 실리게 됩니다.

20개월만에 태어난 을지문덕이나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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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2010.12.06 07:52:20
*.135.144.179

열거하신 사례들을 통해 

정말 철저하게 한 인간으로 살다간 위인의 삶을 봅니다.

갑자기 이런 불경스런 생각이...^^

예수님의 일생도 이렇게 각색되었다면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는 혹 없을까...?ㅎㅎ

사따님, 재미있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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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12.07 12:50:51
*.160.132.218

웃겨님.

저도 불경스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다 제쳐두고

부활의 새생명을 체험한 이들의 생생한 기록이

성서를 대할 때마다 제 가슴을 채워서

다만 '그리스도를 얻고자'

간절히 오늘의 파루시아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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