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본 -hr 집 앞 풍경 새그림  20210225.jpg


봄비 내리는 오후,

우리집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한 남자를 떠올리며....

할 수만 있다면 이 그림을 그에게 주고 싶다.


구정 설날 오후 즈음이었다.

보라가 누군가를 향해 짖어댔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 뒤 돌 축대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적은 듯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우리집 뒤란을 서성이는 그 남자가 명절을 쇠러 온 윗집 아들 쯤이려니 여겼다.

 " 아.. 전에 여기 살던 사람입니다.

궁금해서 한 번 와 봤습니다. 살짝 다녀가려 했는데 그만..."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집 터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말에 나는 반색을 했다.

"아..! 그러시군요."

"좀 둘러보아도 될까요?"

"네 그럼요!"

그는 선선히 응해주는 내게 이렇게 응수했다.

"이곳을 열아홉살에 떠났어요.

그 후 늘 그리운 곳이죠.

그는 마흔 일곱이라고 했고 성남에 산다고 했다.


" 집터가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어요."

새로 들어선 우리집터를 둘러보는 그의 표정은 아쉬움 반 놀라움 반으로 뒤석여 있었다.

나는 뭔가 모르게 미안해졌다.

누군가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무엇을 무참히 뭉개어 버린 민망함이랄까..

 그런 감정을 무마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관대해졌다.

"고향집이구나...왜 안 그립겠어요.

편하게 둘러보세요."

내가 사는 터전이 어떤 이의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자리라는 것이 묘한 감정을 불러냈다.


그는 우리집 뜰에 서서 동네를 바라보며 유년의 추억을 얘기했다. 

옛날집 마루 위에서 보면 저 신작로가 다 보였어요.

아침에 이를 닦다가 저 만치 버스가 오면 부리나케 정류장으로 뛰었죠.

그럼 버스와 딱 맞게 만나요. 하하 그때는 비포장이라 버스가 빨리 못 달렸거든요."

눈빛에 추억과 그리움이 그득했다.

유년의 시간들이 되살아나는 듯.


"이 앞집이 우리 큰집이예요.

저 벽에는 큰 철사줄에  사다리가 매달려 있어서 그걸 타고 놀았는데..

아, 철사줄이 아직도 있네요!"

지금도 늘어져 있는  녹슨 철사줄을 보고는 감개무량해 하는 것이다.

내게는 눈에 띄지도 않던 앞집 처마밑의 철사줄이

그에게는 유년의 추억이 주렁주렁 묻어 나오는 특별한 줄이었던 것이다.


"아.. 저 담이 저렇게 낮았었네.. 그때는 그렇게 높아보였는데.."

그는 옆 집을 휘도는 담벼락을 뛰 넘고 놀다가 유리에 찔려 팔목을 베었다며

아직도  남아있는 손목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남자는 즐거운 개구장이 소년의 표정이 되어있었다.


가끔 이 동네 꿈을 꾸어요, 너무 그리워서 저 혼자 몇년 전에도 다녀갔어요.

 이젠 부모님도 다 도시에 살고 계시고 해서 이곳에 올 일이 없는데

오늘은 그냥 차를 타고 내쳐 달려 왔죠. "


"예전엔 동네에 집이 참 많았어요.

올 때마다 동네가 줄어들더니 이젠 아주 텅 빈 것 같아요."

쓸쓸함이 전해졌다.


살던 집터에 낮선 새집이 들어서고 

외지인이 들어와 살고 있는 고향집을 보는 그의 심정이 어떨까.

 위로가 될까 해서 집안에 들어오라고 해서  

옛 문이 달려있는 다락방으로 안내했다.

내 예상대로 남자는 매우 감동했다.

 말없이 옛 문을 바라보던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수시로 드나들었을 문..., 문고리...

문 하나로 그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상쇄되었다.

그가 알까.

이 옛 문이 얼마나 어렵게 살아 남았는지...

그리고 옛 집을 허물던 순간 내게 저며오던 그 알싸함을....

나는 옛집의 툇마루짱도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고 말해주었고 그는 고마워했다..

이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와 나 사이에 귀한 걸 공유한 듯한 동질감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성남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동차로 갔고

나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포장이 잘 된 도로를 달리며

그가 느꼈을 애상이 한동안 여운처럼 휘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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