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발단이었다.
사진을 정리하던 남편이 건네 준 사진 한 장.
20대 초반, 풋풋한 세 아가씨들이 거기 있었다.
대학 졸업 후 행정조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나와,
함께 일했던 후배 둘이다.
그 사진으로 사십년 전 추억에 잠겼다.
내게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 준 고마운 M,
수녀가 된 H. 둘 다 그립다.
특히 수녀가 된 H가 늘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당차고 똑똑했던 그녀. 우윳빛 피부에 고른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던 시원한 웃음.
노래 잘하고. 말 잘하고 일도 잘하고 활동적이던 H....,
1년 후배지만 참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그런 그녀는 20대 초반부터 수녀가 되겠노라 했다.
당시 만해도 나는 수녀원은 사연이 있거나 세상살이를 피하고 싶은 이들이 들어가는 곳인 줄 알았다.
H처럼 똑똑하고 이쁘고 능력 있는 여자가 수녀가 되겠다니! 아까울 뿐이었다,
H는 결심대로 수녀원으로 갔고 나는 결혼을 했다.
그 후 연락이 끊겼고 세월이 흘렀다.
H가 수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살면서 문득 문득 H가 보고 싶었다.
사진을 본 그날, 그녀를 수소문하기로 맘 먹었다.
먼저 H의 본가가 있는 지역 성당으로 전화를 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몇 시간 후 성당에서 전화가 왔다.
그 통화에서 H가 성가소비녀회 소속 가브리엘 수녀라는 것과
아직도 그 성당에 나오신다는 H의 어머니 연락처를 알았다.
H의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연로해지신 어머니는 딸을 찾는 친구라니 반가워하셨는데
안타깝게도 눈이 안보여 전화번호를 불러줄 수가 없단다.
그런데 H의 소임지가 전라도 광주의 한 병원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거면 충분했다.
인터넷에서 그 병원 전화번호를 찾았고 드디어 연결됬다!
-여보세요?
-가브리엘 수녀님을 부탁합니다.
-네 전데요.
40년 전과 똑같이 활기있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가슴이 뛰었다.
-나 김혜란이야~!
-어머,어머~!!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기뻐했다.
몇 주 후 H를 만났다. 그녀가 원목수녀로 활동한다는 전라도 광주의 병원 앞에서.
병원으로 들어서며 나는 기대와 반가움으로 설레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서 있는 회색빛 수녀복의 H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작아진 키 때문이었다.
‘아니, 왜 저렇게 키가 작아졌지?’그러고 보니 신발 때문이었다.
높은 구두를 좋아했던 H의 예쁜 발 맵시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긴 퍼머 머리며 잠자리 날개같이 하늘거리던 병아리색 투피스도, 가늘었던 허리도.
다시 만난 H는 하이힐이 아닌 단화를 신고 있었고
가늘던 몸은 회색빛 수도복에 쌓여 둥글게 변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변한 모습에 놀랐다.
아뭏튼 이렇게 다시 만났다.
이십대 청춘에서 육십을 넘긴 초로의 여인들이 되어.
눈부신 젊음은 가고 없었지만 H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고 기분 좋은 생동감이 흘렀다.
우리는 병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만나는 순간, 사십년의 공백은 사라졌고 곧
옛날로 돌아가 친근한 수다를 쏟아냈다.
추억을, 그간 살아온 사연들을. 그리고 현재를 공유했다.
5시간이 넘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H는 수녀원에 입회해서 종신서원까지의 과정을,
또 수녀의 소임을 감당하며 살아 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시원시원한 달변으로.
특히 중국 선교를 하던 때의 일화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녀와 얘기하는 내내 유쾌한 생동감이 전해졌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예상대로 그녀는 씩씩하고 멋진 수녀였다.
그녀는 말했다.
-신앙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굳굳히 견뎌내는 것! 이라고.
시련을 겪어내시는 어머니를 보며 깨달았다며.
나는 든든하게 뿌리 내린 한 그루의 나무를 보는 듯했다.
이렇게 든든한 노장(?) 수녀가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을
길을 걸어 온 H에게 박수를 보낸다.
헤어질 때 H는 병원에 두고 온 마카롱을 주고 싶어 했다.
여전했다. 주변을 잘 챙기던 습관도.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우리 둘 다 열심히 살아왔구나..싶었다.
수녀원이라는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수도원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인도 되어.
그녀는 수도자로, 나는 가정주부로 각자 다른 길을 들어섰지만
수도원이냐, 가정이냐의 선택이 달랐을 뿐 결국 모두 수도자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H가 잘 살아가리라 믿는다.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서 죽는 날 까지 가브리엘 수녀로 말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도한다.
---그림없는 그림일기를 올립니다.^^


담 번엔 그 친구가 휴가 받아 진안에 오겠답니다.
저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편이었는데
그 친구는 당찬 기질이 있었어요.
불의를 못 넘기는 성격이라 학장에게 불려 다니면서도
끝까지 학교 비리를 따져 관철시킨 전력이 있죠.
대쪽 같은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서
대빵 수녀들에게 엉기고 ..ㅋㅋ . 그래서 쉽게 살지를 못한대요.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으로 용기있는 친구입니다.
음악성이 있어서 수녀원에서 뮤지컬도 연출하고, 멋진 수녀예요.
시스터 엑트를 연상케 하는...좋은 친구를 다시 찾아서 기뻐요.
목사님 말씀대로 별로 변한 게 없었고 오히려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잘 계시지요.
언제 한번 얼굴 한번 뵙야 하는데, 언제 뵐 수 있으려나~
수녀, 비구님 스님들은 대단 하신것 같네요.
한평생을 그렇게 산다는 것이 참 힘든데, 세상의 열정을 누루고 사신다는 것이 대단 하십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제 사촌누님은 수녀 되겠다고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3개월만에 나왔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수사, 스님을 잠시 생각 해보았는데 정말 힘든 길이라 생각이 드네요.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닌것만은 확실 합니다.
저도 가끔 여고 동창 친구들을 만나는데
금방 40년을 훌쩍 넘어 교복입었던 교실 분위기로 돌아가더라구요
수사반장처럼 친구를 찾아 내어
광주로 달려가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설렜었을지
조금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
친구찾기에 성공하신것을 축하드려요^^
다음엔 가브리엘 수녀님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주실거죠?
와, 대단합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20대 초반의 단짝을 만나셨다니요.
40년의 세월이 지나면 서로 세계관이 달라져서
부분적으로는 어색할만도 한데 5시간을 '순삭' 하듯이 함께했다는 걸 보면
두분 모두 그 옛날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나 봅니다.
가끔 광주 나들이를 하셔야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는 방송국 '작가 언니'들에게
좋은 소재가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