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10주년이다.
아버지 기일이면 각기 일산과 진안 캄보디아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이 줌으로 만나 추도예배를 드린다.
이번에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나가 있는 남동생이 마침 건강을 체크하러 나와있어
3형제는 모두 일산 큰언니 집에서 모였고 나와 남편만 진안에서 줌을 통해 참석했다.
조촐하지만 뜻깊은 시간이었다.
일산에서 작은 교회 담임을 하고 있는 오빠의 주도로
디모데후서 4장 7~8절을 읽고(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평소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610장 찬송(고생과 수고 다 지난 후)을 불렀다.
예배 후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영향들을 나누었다.
오빠가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목회를 하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
'300명 정도 되는 교회 목회를 하면 대통령 보다도 나은 거다'
ㅎㅎㅎ 실제로 내 주변에 300명 넘는 교회 담임목사를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은 죽어라 힘들어하던데..ㅋㅋ
아마 그게 아버지의 꿈이셨던 것 같아. 시골 작은 교회 목사로서 이루지 못한.
언니:
"아버지가 여름마다 비료 포대에 감자를 가져다 주셔서 왜 맨날 지겨운 감자일까..
했었어. 이제야 아버지가 그 감자를 가져오실 때 얼마나 무거우셨을지.. 가슴이 먹먹하다."
남동생: 어릴 때 추운 겨울 새벽에 눈 떠보면 늘 아버지가 안 계셨어. 새벽기도를 가신 거야.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들도 없었을 텐데 집에서 하셔도 되는데 꼭 예배당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어.
지금처럼 따뜻한 오리털 파커도 없었을 시기에 그 추운 예배당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하셨으니...
정말... 대단하셨어.
우리는 아버지께서 고생하신 것에 비하면 너무 편히 사는 거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우리가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살아오셨을 아버지..
내게는 영상처럼 각인되 있는 장면 하나가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오래 못 가실 거라는 건 이미 감지된 상태였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가까운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힘없이 내가 미는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계셨다.
집 앞에서 탈진된 아버지께서 힘없이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셨다.
순간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나부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시던 아버지...그리고 힘없이 나부끼던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
내게 각인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가 마지막 본 하늘..
그 하늘 아래 우리 사남매가 살아가고 있다.
오빠가 말했듯이 아버지께서 크리스찬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아버지의 신앙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우리 사남매가 감사하게도 모두 그 신앙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산다.
우리의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아버지의 영향이 스며 있다는 사실이 오늘 새삼 깊이 느껴진다.
사랑으로, 든든히 지켜주던 울타리로..
우리가 아버지를 기억하듯, 우리 아이들도 우리를 기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내 아이들은 훗날 어떤 추억으로 나를 기억하게 될까?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다.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저도 며칠전에 어머니 8주년이었네요. 온 가족이 어머님 생일 축하로 전국에서 모여 게곡 가든으로 놀라가서 재미있게 노시고 자녀들 집에 잘 도착했는지 전화로 일일히 확인한 다음에 가셨습니다. "이 세상 한바탕 참 잘 놀다 간다."이것이 마지막 말씀... 우리는 부모님들의 그 싶은 신앙을 돌아기신 뒤에야 아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