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45)

조회 수 703 추천 수 0 2019.11.01 20:39:36

키리에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라틴어 문장이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도 된다. 중세기 미사곡에 자주 나온다. 진혼곡인 <레퀴엠> 합창곡에는 반드시 나온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입에서는 이 기도 외에는 나올 게 없다는 뜻이다. 나도 동의한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살아온 과정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과 책망받을만한 일을 저울에 달아보니 책망받을만한 쪽이 훨씬 무겁다는 게 확인된다. 내 손에 죽은 벌레들이 많다. 거처를 시골로 옮긴 다음부터 그런 일들이 더 많이 벌어졌다. 집안에 들어온 벌레를 가능하면 살짝 붙들어 밖으로 내보려고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들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체 아닌가. 돼지와 소는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나 제법 먹은 것은 분명하다. 평생 먹은 생선의 양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내가 살기 위해서, 또는 입맛을 즐기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먹는다는 것이 지구 생태 메커니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별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키리에 엘레이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책망받을 일이 많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한 적이 많다. 직접 만나거나 메일로 상담을 원하는 분들이 있었고, 글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목회자 운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주례를 부탁받거나 집을 방문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간혹 돈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름만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완전히 낯선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모른 척하면서 스쳐 지나간 노숙자들은 수없이 많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노력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처리했다. 인색하게 산 것이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용서받아야 할 일들 역시 산더미와 같다. 키리에 엘레이손!

가장 크게 책망받을 일은 목회자로서, 특히 설교자로서 살아가면서 발생했을지 모른다. 예수가 책망한 서기관들의 행태와 나의 행태가 다를 게 없었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너무 많은 설교를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설교가 얼마나 허술했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이 명백하다. 어쩌다가 괜찮은 설교를 했다고 해도 그걸 듣는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하게 배려하지 못한 잘못도 크다. 그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항력이긴 했다. 내 설교에 위로를 받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마음 상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이기심과 교만만이 아니라 선의에 의해서도 교회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는 신자들이 있었다.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내 설교와 목회는 심판받아 마땅하다. 키리에!

내가 죽을 때 키리에를 기도하겠다는 말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자 탄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생명의 비밀에 대한 기쁨의 찬양이기도 하다. 내가 직면한 모든 것들은 원초적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만나는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는 무한한 심연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로 가득하다. 김 집사, 박 집사, 최 집사, 정 장로, 오 권사 등등,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모든 이들은 아득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교우들의 집합인 교회 공동체는 우주적인 차원의 거룩한 사건이다. 그 모든 삶을 선물로 받았으니 키리에 엘레이손 찬양을 바칠 수밖에 없다.

목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교회 공동체를 책임질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다만 우리는 더불어서 기다리는 동시에 서두르면서 주님의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236) 있을 뿐이다. 목사인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공동체다. 목사의 처지에서 이게 얼마나 다행인가. 동시에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교회 공동체를 명목상 책임을 지는 목사로서 나는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편안하다. 이 두 가지 심정으로 나는 키리에 엘레이손이라는 찬양을 드린다.

키리에 엘레이손은 죽는 순간에만 드리는 게 아니라 아직 목사로 활동하는 지금 여기서 드려야 할 기도이자 찬양이다. 목회는 부단히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매 주일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를 실행하는 현장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교우들과 교회 문제로 회의를 진행할 때도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원만한 결과가 나오거나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결과가 나와도 하나님의 자비가 나에게 필요하고, 교우들에게도 역시 필요하다.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교만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낙심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목회 활동 전반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중이다.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키리에 엘레이손항목은 근간 졸저 <목사 구원>에서 끌어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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