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41)

조회 수 1286 추천 수 0 2019.10.26 19:07:44

장로

장로는 교회의 양 무리를 돌보는 목회자다. 그가 지녀야 할 세 가지 태도가 2절과 3절에 나온다. 1)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라. 2)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 하지 말고 자발성으로 하라. 3)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하지 말고 본이 돼라. 당시에도 문제가 보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느 집단이나 이런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왜 그런 이들이 없겠는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도 이런 부류의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항목이 재미있다. 아마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재물을 모은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일들은 그 사람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기 때문에만 벌어지지 않는다. 선의로도 벌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의 담임 목사가 재정 장로와만 아는 비밀 계좌를 열었다고 하자. 교회가 어려움에 떨어지거나 선교할 일을 대비해서 현금을 따로 관리하는 것이다. 수십억, 수백억이 쌓일 수 있다. 재정 장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거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그 재정을 사사롭게 사용할 수 있다. ‘기꺼이하라고 말한 걸 보면 교회 지도자들은 사례비보다는 소명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세 번째 항목은 오늘에도 아주 실감 나는 이야기다. 권위주의에 떨어지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교회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도 자기주장에 특히 강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주장이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교만

벧전 5:5절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고다. 사실은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주제는 아니다. 나이가 젊다기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인 장로와 대비되는 뜻으로 젊은이라고 한 것 같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거꾸로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주신다는 것이다. 교만과 겸손은 교양처럼 보이기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건 착각이다. 교만은 소위 원죄에 해당한다. 어거스틴은 죄를 휘브리스’(교만)이라고 규정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 사랑이라고 했다. 교만한 자의 특성이 자기 사랑이다. 판넨베르크는 죄를 자기 집중, 자기 연민(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했다. 다 통하는 개념들이다.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삶의 방식, 또는 그런 기질을 가리킨다. 자기를 중심에 두기에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현대 심리학이나 철학은 자기에게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긍정 심리학이다. 이게 죄인 이유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간은 생명에서 소외된다. 자기를 확인하려고 재물과 사회 지위에 집중한다. 재물이 늘고 신분이 높아진다고 해서 사람이 만족하는 게 아니다. 집착할수록 공허도 비례하여 더 깊어진다. 생명과 더 멀어지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교만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순전한 기독교> 192쪽 이하에서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발췌 방식으로 요약하겠다.

 

성도덕은 기독교 도덕의 중심이 아니다. 중심은 교만이다. 성적인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등은 교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악마는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다.

교만은 다른 이들의 교만과 경쟁 관계에 있다. 다른 악은 우연히 경쟁적으로 되지만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더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 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하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어도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사람과 사람을 본다.

기독교인인데도 교만한 사람은 상상 속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기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 악마를 따르는 것이다. 덜 나쁜 악들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인 본성을 이용하기에 생기지만 교만은 지옥에서 곧장 온다. 다른 악들에 비해서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교만을 통해서 인간적인 유혹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만이라는 독재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악마는 우리를 순결하고 절제하며 용감하게 살도록 허락한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역겨운 사람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말을 하든지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는다. 아예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걸쳐서 겸손한 사람이 되기 힘들 것이다. 교만이 몸에 뱄다. 무엇인 교만인지도 모른다. 교양으로 겸손을 위장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매우 곤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 비유 앞에서 우리의 생각은 복잡하다.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살고 싶어 한다. 실제로 자기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자기를 높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살면서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칭찬한 세리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기독교인의 심리가 이중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는지.

어떻게 실제로 겸손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다른 뾰족한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다. 그것의 하나를 나는 앞에서 순교 영성이라고 말했다. 순교 영성을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 그 세례 의식이 반복이라 할 성찬식의 참된 의미 안으로 구도 정진으로 태도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이미 죽었기에 자기는 없고, 예수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지금의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다.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인 빵과 포도주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는 무엇이 더 우리에게 필요하겠는가. 이런 세례 영성과 성찬 영성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다. 이런 신앙 경험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기에 우리는 순례자처럼 푯대를 향하여 천천히, 그러나 치열하게 좌고우면 없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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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9.10.27 16:54:24

오늘 말씀은 골백번 읽고, 묵상하고, 통곡해야 할 것같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고, 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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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10.27 22:54:46

예, 저에게도 찔리는 구석이 많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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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2:1 new

  • 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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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4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우리는 이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까지 왔습니다. 22장에서도 요한은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를 통해서 묵시적 환상을 경험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창 2:10-14절 내용과 연결됩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에덴동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강이 나옵니다. 첫째 줄기의 강은 비손이고, 둘째는 기혼이며, 셋째는 힛데겔이고, 넷째는 유브라데입니다.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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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3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7절에 다시 생명책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못한 자들은 이 세상의 악한 권력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계 13: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들은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

계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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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2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6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영광(δόξα, glory)은 요한계시록에 흔하게 나오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붙일 수 없는 개념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완전히 변화된 세상이라서 사람도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영광...

계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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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1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5절 문장이 약간 이상합니다. 거룩한 성에는 밤이 없어서 낮에 성문을 닫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문은 보통 밤에 닫지 않습니까. 낮에는 원래 열어두는 거고요. 밤에도 성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해야 자연스러운 표현인데, 위 구절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아닙니다. 아예 문이 필요 없겠지요.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

계 21:24 update [1]

  •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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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0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4절의 표현은 장엄하기 이를 대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왕이 각각의 영광 가운데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에 던져질 자들은 모두 던져진 이후의 일이니까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자들에게 ‘자기...

계 21:23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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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9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은 해가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세상을 내다봅니다. 빛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 60:19-20절에서 이에 관해서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

계 21:22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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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8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2절에는 아주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성전 하나쯤 있어야 거룩한 성이 빛나 보일 텐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종교 건물이 없는 곳을 거룩하다고 이름 붙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요한이 본 거룩한 성은 그것 자체로 완벽하기에 성전은 없어도 ...

계 21:21 [2]

  •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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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7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12절에서 언급된 열두 문이 21절에서 다시 소개됩니다. 각각의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습니다. 진주 한 알이 박혀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문 전체가 진주로 되어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문을 만들만한 크기의 진주는 세상에 없습니다. 문이 진주 모양을 했다는 뜻인가요? 그냥 편하게 진주로 된 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문에 이어지는 길이 나옵니다. 길은 ‘맑...

계 21:20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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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6 21:20 다섯째는 홍바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다섯째부터 열두째까지 당시의 모든 보석이 열거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석들이군요. ...

계 21:19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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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5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각각 기록된 열두 기초석도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19절에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벽옥,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비취옥)입니다. 옥수(玉髓)는 낯선 단어인데, 보석의 일종으로 보면 됩니다. 정말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요한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본 것 중에서, 그리고 상상할 수 ...

계 21:18

  •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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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4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8절에 다시 벽옥과 정금(순금)이 나옵니다. 요한이 어디서 이런 건축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요? 사람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이 에로스처럼 강합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빛나는 건축물을 향한 욕망 말입니다. 그런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빛내고, 더 근본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아내나 연인을 위해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물을 짓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

계 21:17

  •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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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3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성곽은 144 규빗이라고 합니다. 1 규빗이 대략 50cm 정도니까 72m가 되는 셈입니다. 성곽, 즉 성벽의 전체 둘레는 물론 아니고, 높이이거나 두께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앞 구절에서 성체의 높이가 2,304km라고 했으니까 72m 높이의 성벽은 너무 낮아 보입니다. 144규빗은 성벽의 두께라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정도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두께입니다. 옛날에는 철근 콘크리트 없이 순전히 기하학적인 기술로...

계 21:16 [9]

  • 2024-04-08
  • 조회 수 235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2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거룩한 성에 대한 묘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위 16절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봅시다. 거룩한 성은 정육면체이거나 피라미드 모양의 탑입니다.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각각 12,000 스다디온이라고 합니다. 1스다디온은 192m라고 하니(계 14:20) 자그마치 각각의 길이가 2,304km에 해당하는 크기입니다. 저런 크기의 성 앞에서는 높이가 대략 ...

계 21:15 [2]

  • 2024-04-05
  • 조회 수 161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1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자를 가졌더라 요한에게 말하는 자는 앞서 계 21:9절에 나왔듯이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입니다. 그 천사가 성과 문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합니다. 보통 자가 아니라 금으로 된 자막대기입니다. 요한은 거룩한 성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중입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해도 재창조될 새 예루살렘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애벌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비의 세계를 정확하게 경험할 수 없...

계 21:14 [2]

  • 2024-04-04
  • 조회 수 158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0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2절에는 성곽에 열두 문이 나오는데, 여기 14절에는 성곽에 열두 기초 석이 나옵니다. 열두 문에는 열두 지파 이름이 기록되었고, 여기 기초석(주춧돌)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통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 공동체의 열두 사도에게 이어졌다는 뜻으로 봐도 좋겠지요. 이런 표현은 상징입니다. 열두 지파나 열두 사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

계 21:13 [2]

  •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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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9 21: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열두 문이 동서남북 사방에 나뉘어 있습니다. 이런 분류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거룩한 성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주님의 몸이며 거룩한 성이면서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사방을 향해서 닫혀 있는 게 아니라 활짝 열려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밀의 종교가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려는 보편 종교의 길을 걸었...

계 21:12 [4]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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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8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새 예루살렘인 거룩한 성에 대한 설명이 약간 복잡해집니다. 묵시적 상상력에서 표상된 그림같이 멋진 성입니다.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올만한 모습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에 열두 문이 있다고 합니다. 성곽은 성벽을 가리킵니다. 열두 개는 많기는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성을 들락거리는 성문은 숫자가 적을수록 좋습니다. 관리하기에 편하...

계 21:11 [2]

  • 2024-04-01
  • 조회 수 135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7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1절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묘사됩니다. 앞에서 저는 ‘어린 양의 아내’라는 표현을 근거로 본문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 나오는 묘사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이 이 대목에서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재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혹은 종말 이후의 세...

계 21:10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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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6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겔 40:2에서도 에스겔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상한 성읍 형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높은 산은 영적인 경험이 일어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모리...

계 21:9 [2]

  • 2024-03-28
  • 조회 수 142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5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9절부터 ‘새 예루살렘’이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에 관해서는 이미 16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여기 21:9절에서 다시 그 일곱 천사 중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심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안내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표현이 재미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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