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1), 3월29일

조회 수 8645 추천 수 86 2006.03.29 23:20:52
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40:4,5절을 보충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눅 3:4-6). 이사야의 오리지널이 마가복음에서 1차로 변형되었고, 누가복음에서 훨씬 많이 보강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전제한다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나올 테니까 여기서는 그냥 숙제로 남겨두고, 진도 나갑시다.
마가가 이사야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광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딱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기원을 출애굽으로 잡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그들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는 출애굽 이후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민족적인 정체성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다윗과 솔로몬 왕조 이후에 소급의 방식으로 찾아낸 설화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무게는 별로 없습니다. 그들의 민족적인 특성을 명실상부하게 확보한 사건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인 엑서더스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제국의 문명으로부터 원초적 자연 상태로 남아있는 미디안 광야로 삶의 근거를 옮김으로써 전혀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돌입했습니다. 요즘 용어로 그들에게 신앙적인, 세계관적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그마치 4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스무 살 이상 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모두 그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 말은 이집트의 정치, 문화, 질서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이 광야에서 완전히 물갈이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영성을 공급받았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들에게 광야는 영원한 영성의 샘물입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을 불붙는 떨기나무로 만난 호렙산과 출애굽 이후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시내산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동일한 산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를 통해서 미디안의 성지인 이 거룩한 산에서 야훼를 경험했고, 결국 이스라엘 신앙의 진수인 율법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산’은 광야의 한 부분입니다. 광야가 곧 모세의 하나님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디안 광야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광야일지 모릅니다. 광야에 내동이 처진 나그네 같은 운명이 바로 그들의 역사였습니다. 유럽과 근동을 지배했던 제국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천애고아처럼 치열한 생존투쟁에 매달렸습니다. 광야를 실존적으로 살아내야 할 개인이나 민족은 늘 죽음과 삶의 경계에 직면해야하기 때문에 호전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대한 이스라엘의 행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북한 체제가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듯이 이스라엘의 반 팔레스타인 정책도 비정상적으로 보이겠지요.
어쨌든지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광야의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예수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복음은 율법을 통과해서 오는 것이지 율법 없이 올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그 광야의 하나님 경험을 제거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그를 통한 구원 사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레벨:18]눈꽃

2008.10.30 20:44:30

그동안 무식의소치때문에 결코 게으름때문이아니라 ㅎㅎㅎ, 진도따라가기위해 머리에 질끈 띠 동여매고 흡사 고시준비생처럼 열심히따라가고있는중입니다 ! 정목사님께서는 이유를 아시겠지만.... 나머지공부하는사람에게도 보살핌을부탁드리면 너무 염치없는 ?!........ 평상시많이쓰지않는 철학용어(패러다임 쉬프트) 사전찿아서 뜾이해하랴 공부는마니하게되어좋긴한데.... 목사님! 내용이좋아도 쉽지않아 지레겁을먹고 읽기를 포기하는분들도 있지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듭니다......"복음은 율법을 통과해서오는것이다 ","그 광야의 하나님 경험을 제거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그를 통한 구원 사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밑줄 쫙 해놓긴했는데ㅠㅠ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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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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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6 사탄아!(7)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짧은 묵상의 글에서 제가 번번이 위험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성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는 다루기 힘든 주제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본문을 다루든지 깊이 들어가다 보면 그 문제를 건드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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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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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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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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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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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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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0일 사탄아!(1)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베드로의 항변을,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항변인데, 들으신 예수님은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사탄아!” 병행구인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는 “사탄아!” 하는 예수님의 책망이 거론되지...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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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난, 죽임, 부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메시아 상이 이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부활’에 관해서 한 마디 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고난과 죽임이 예고되었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의 운명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명시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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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고난, 죽임, 부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베드로가 가로막았다는 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우리도 항변했겠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함께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아멘으로 화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린 ...

5월17일 케리그마(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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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7일 케리그마(1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과 부활을 케리그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이 케리그마에 매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신앙을 관념적이라거나 실천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케리그마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케리그마에 천착...

5월16일 케리그마(9) [2]

  •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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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5월15일 케리그마(8) [2]

  • 2008-05-14
  • 조회 수 1667

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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