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털 옷, 4월6일

조회 수 13631 추천 수 24 2006.04.06 23:24:45
2006년 4월6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낙타털 옷

마가의 설명에 따르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고급 모피코트를 입은 멋쟁이군요. 동물애호가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 요한이 활동하고 있는 광야로 나가서 데모를 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누군지 아시죠?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과 이브에게 야훼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옷도 역시 가죽제품이군요. 하나님이 직접 동물을 잡아서 각을 뜨셨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그건 무슨 동물의 가죽이었을까요? 성경퀴즈입니다.
세례 요한의 낙타털 옷은 멋과 부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광야에서 불을 토하듯 설교하는 요한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돋보이게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소유의 삶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합니다. 낙타는 광야를 횡단하는데 필수적인 동물입니다. 등에 물혹이 있어서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사막에서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분들 중에서 낙타 무릎을 예로 드는 분들이 있더군요. 낙타는 어느 모로 보나 인내의 동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의 낙타털 옷은 그가 영적인 인내심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닐는지요.
어쨌든지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보면 그가 제사장의 아들이었지만 대를 잇지 않은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의 잘 나가는 목회자들 중에서는 아들이나 사위에게 당회장 직을 세습하는 이들도 있는데,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그럴만한 위인이 못되었나 보네요. 요한은 제사장 옷을 입지 않았으며, 귀족의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광야에서 고독하게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요한은 낙타털 옷 한 벌로 평생을 지냈을 겁니다. 한평생이라고 해봐야 예수와 동년배니까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스무 살에 출가했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니면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타털 옷을 입을 기간이 짧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은 일절 접어두고 오직 민족의 미래와 하나님의 임재에만 온 영혼을 집중하던 요한에게는 다른 옷이 아예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옷은 그야말로 몸을 보호하는 역할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 한 벌로 한 인생을 충분히 살았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옷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같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과 불교의 승려들은 개신교 목사들에 비해서 옷에 관한한 아주 소박합니다. 특히 선승들은 평생 한, 두벌의 승려 복으로 삽니다. 헤어지면 다른 천을 대서 깁고, 또 다시 깁고 해서 누더기 같이 될 때까지 입습니다.
하기야 우리의 몸을 가리는 옷이 한 벌이든, 열 벌이든 그게 무슨 큰 문제겠습니까? 모든 건 형편에 따라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현대사회에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는 옷을 소비해야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의 소비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이 지구의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는지 정확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마음의 옷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이 큰 사람이야말로 옷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과 똑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었다는 건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단순화한다는 의미겠지요. 그런 단순성이 바로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한 영성입니다. 우리도 각자에게 어울리는 영혼의 낙타털 옷이 필요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오직 당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영혼의 낙타털 옷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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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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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4일 ‘어록’2(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어제의 묵상에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병든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생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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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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