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띠, 4월8일

조회 수 5166 추천 수 90 2006.04.08 23:31:08
2006년 4월8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허리띠

세례 요한은 옷을 간소하게 입었습니다.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허리띠를 매는 옷을 입었습니다. 요한은 먹는 것도 생명에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충 해결했습니다. 저는 요한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한 본문을 읽으면서 구약의 한 장면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고센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전날 밤에 행했던 의식(儀式)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었으며,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장면을 출 12: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일반적으로 식탁에서는 허리에 띠를 풀어야 하고, 신도 벗어야 하고, 손에 든 것은 모두 내려놓아야 하고, 그리고 가능한 천천히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만찬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다음날 일찍 이집트를 떠나야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떠난다는 건 노예의 삶으로부터 자유인의 삶으로 삶의 토대가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삶의 중심이 자리이동을 하는 순간에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 12:11절은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쫓기는 듯한 그들의 식탁은 ‘유월절’ 사건을 회상하는 자리입니다. 이날 밤에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전역을 찾아들었습니다. 모든 집의 장자와 집짐승의 맏배가 죽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소수 민족을 학대한 이집트 사람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었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야만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이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사건이 곧 유월(逾越, pass over)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 그 순간에 쾌적한 상태로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면 오늘도 역시 죽음의 천사들이 우리를 방문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늙은 사람만이 아니라 젊은이와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일어납니다. 병원, 전쟁터, 자동차들이 달리는 고속도로, 공장, 혹은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집안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곳에서 여러 종류의 죽음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걸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외면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해도 죽음의 천사는 밤안개처럼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집트에 임한 열 번째 재앙인 떼죽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고대는 이런 떼죽음이 그렇게 드믄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천재지변이나 전염병이 한 마을, 한 민족을 파멸시키는 일은 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설명했습니다. 이런 역사 해석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 이런 떼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날지 모릅니다. 지구에 살고 있던 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몰살했습니다. 공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인간도 그중의 하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들과 달리 문명이 있다구요? 그 문명을 믿으시나요? 그 문명이 우리를 떼죽음으로부터 구원하리라고 봅니까? 인간 문명은 바로 인간 종의 멸망 원인이 될 개연성은 높습니다. 아주 먼 훗날, 10억 년쯤 후에 인간과는 다른 어떤 지성적인 생명체가 인간 종의 멸망 원인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지도 모릅니다.
죽음과 삶의 큰 힘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3천4백 년 전 허리띠를 띠고 유월절 만찬을 먹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2천 년 전 광야에서 허리띠를 띠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처럼 영적인 허리띠를 띠고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리기 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달음질을 위해서도 역시 그런 허리띠가 필요합니다.

주님, 우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유월절 만찬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리고 어둠의 시절에 광야에서 야인으로 살았던 요한처럼 허리띠를 준비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6월20일 ‘어록’5-8

  • 2008-06-19
  • 조회 수 1407

2008년 6월20일 ‘어록’5-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온다.”는 것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재림신앙을 근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막 9:1)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기도 ...

6월19일 ‘어록’5-7 [4]

  • 2008-06-18
  • 조회 수 1864

2008년 6월19일 ‘어록’5-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고대인들이 왜 천사를 생각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들의 그림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라파엘의 천사 상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 손을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보는 천사의 그림이 저의 집에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라파엘에게는 하늘에 대해 관심이 참으로 많았...

6월18일 ‘어록’5-6 [2]

  • 2008-06-17
  • 조회 수 1472

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6월17일 ‘어록’5-5 [2]

  • 2008-06-16
  • 조회 수 1396

2008년 6월17일 ‘어록’5-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는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구원도 결국 죽어서 천당 가는 정도로만 받...

6월16일 ‘어록’5-4

  • 2008-06-15
  • 조회 수 1276

2008년 6월16일 ‘어록’5-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한국교회에는 심판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마치 염라대왕쯤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태만한 자들을 유황불이 뜨겁게 타고 있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그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이지 실체를 말...

6월15일 ‘어록’5-3 [6]

  • 2008-06-14
  • 조회 수 1668

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6월14일 ‘어록’5-2

  • 2008-06-13
  • 조회 수 1394

2008년 6월14일 ‘어록’5-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어록에 나오는 단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우리말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관된 것인데, 이 세상(에온)의 마지막에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인자가 단지 심판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소유한 분이...

6월13일 ‘어록’5-1

  • 2008-06-12
  • 조회 수 1551

2008년 6월13일 ‘어록’5-1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말씀을 앞에 둔 저는 지금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말씀이 말하려는 세계를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신앙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6월12일 ‘어록’4

  • 2008-06-11
  • 조회 수 1377

2008년 6월12일 ‘어록’4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7)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당연히 죽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

6월11일 ‘어록’3(5)

  • 2008-06-10
  • 조회 수 1823

2008년 6월11일 ‘어록’3(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목사들은 우선 자기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구절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목사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경험했으며, 이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명감은 사실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런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에 어...

6월10일 ‘어록’3(4) [4]

  • 2008-06-09
  • 조회 수 1582

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6월9일 ‘어록’3(3) [1]

  • 2008-06-08
  • 조회 수 1375

2008년 6월9일 ‘어록’3(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앞의 두 묵상에서 저는 온 천하와 목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목숨은 온 천하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삶의 능력으로 확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

6월8일 ‘어록’3(2) [1]

  • 2008-06-07
  • 조회 수 2458

2008년 6월8일 ‘어록’3(2)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기독교 신앙은 온 천하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묵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묵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듯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몰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

6월7일 ‘어록’3(1) [3]

  • 2008-06-06
  • 조회 수 1582

2008년 6월7일 ‘어록’3(1)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위의 어록에는 ‘온 천하’와 ‘목숨’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대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온 천하를 무조건 나쁜 뜻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성실한 노력도 모두 온 천하에 속합니다. 예컨대 슈바이처나 데레사 같은 이들의 삶도 역시 온 천하입...

6월6일 ‘어록’2(5) [1]

  • 2008-06-05
  • 조회 수 1195

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6월5일 ‘어록’2(4)

  • 2008-06-04
  • 조회 수 1686

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6월4일 ‘어록’2(3) [1]

  • 2008-06-04
  • 조회 수 1324

2008년 6월4일 ‘어록’2(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어제의 묵상에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병든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생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

6월3일 ‘어록’2(2) [3]

  • 2008-06-03
  • 조회 수 1451

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6월2일 ‘어록’2(1)

  • 2008-06-03
  • 조회 수 1375

2008년 6월2일 ‘어록’2(1)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말이 옳은가요? 우리의 세상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을 때까지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치열한 삶의 모습은 모두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는 노력들입니다. 돈을 벌고, 병원에 다니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학생들의 공부도 역시 ...

6월1일 ‘어록’1(5) [1]

  • 2008-05-31
  • 조회 수 1461

2008년 6월1일 ‘어록’1(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내면적인 기준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만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그럴 때만 우리의 행위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는 허위의식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