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 4월12일

조회 수 5639 추천 수 37 2006.04.12 23:12:51
2006년 4월12일, 성령세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여러 사도들과 대표 집사들이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바울도 세례를 거의 베풀지 않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는 제외하구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어떻게 중요한 교회 예전으로 자리 잡았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가 라틴 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세례 예식도 체계화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사도신경이 주로 로마 교회에서 행하던 세례 문답에 기원한 걸 보면 세례가 초기부터 교회의 예전으로 인정받았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모든 세례는 물로 베풀기 때문에 실제로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 의하면 물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종교적 징표였지만 성령세례는 주로 방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이 왜 성례세례와 방언을 일치시켰는지는 제가 이 자리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은 방언을 성령의 가장 전형적인 현상으로 이해했을 테지요.
바울 자신도 방언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훨씬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아주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편입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8,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물론 바울은 결론적으로 예언과 방언을 품위 있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만(고전 14:40),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방언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전 14장의 전반적인 뉘앙스로 본다면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성령세례의 중요한 현상으로 보았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적 인식론이 역사적으로 제한받고 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화산폭발이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현상으로 인식한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방언 현상도 역시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그들에게 나타났던 신앙적 인식론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화산폭발을 하나님의 임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방언을 성령세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시대에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신앙경험을 기독교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론을 펴실지 모르겠네요. 당신의 논리라면 그리스도교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아무 데도 없는 것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위에서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진리와 무관하다거나, 하나님의 계시행위가 불완전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과 만나는 인간의 인식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천동설을 코페르니쿠스 이후로도 우주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확신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진리인식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반성적이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성령세례의 징표로 생각해야할까요? 오직 하나님의 사건인 성령세례를 제가 이 자리에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어떤 방향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주체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의 주체는 세례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전제한다면 준비 없는 세례였다고 해서 다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세례의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겠지요. 그러나 그 열매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주체이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완전히 맡김으로써 성령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 생명의 영인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아멘.  

[레벨:18]은나라

2016.11.04 14:25:32

제 생각에 성령세례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성령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하는데요.

인간은 죽을때까지 자기 중심적일테지만, 믿음으로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가는 삶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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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7일 케리그마(1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과 부활을 케리그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이 케리그마에 매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신앙을 관념적이라거나 실천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케리그마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케리그마에 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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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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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5월15일 케리그마(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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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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