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같은 성령, 4월16일

조회 수 7447 추천 수 32 2006.04.16 23:15:18
2006년 4월16일 비둘기 같은 성령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0)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나타난 두 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비둘기 같은 성령입니다. 마가는 왜 성령의 임재를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본다면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마 10:16) 근거로 삼는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죄가 없이 순결하신 분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둘기와 관련된 구약성서 구절 중에서 두 군대만 더 짚어봅시다. 노아 홍수가 끝날 무렵에 비둘기가 등장합니다. 40일 동안의 대홍수로 인해서 노아 방주 이외의 모든 생명들이 멸종한 다음, 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일곱 달이 지난 다음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닻을 내릴 수 있었고, 열 달이 지난 다음에는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도 40일이 지난 다음에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았습니다. 물이 어느 정도로 줄어들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마른 땅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칠 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습니다. 저녁 때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칠 일이 지난 다음에 비둘기를 내어놓자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창 8장)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잎에 문 비둘기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생명의 파멸 이후에 새롭게 시작될 생명의 전령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뜻일까요?
아가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 1:15) 비둘기의 눈은 어떤 것일까요? 슬픔인가요, 어리석음인가요? 고뇌에 찬 눈인가요, 요염한 눈인가요? 아가서가 연인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詩)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비둘기 눈은 그윽한 사랑, 순전한 사랑을 품고 있을 테지요.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가는 지금 예수님만이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위에서 비둘기와 연관된 신구약성서의 몇 구절을 인용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비둘기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단지 성령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문학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바로 성령 임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성령이 임재 했다는 사실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이 일치한다는 사실까지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례 받을 때는 말 그대로 성령이 함께 하시지만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는 성령과 하나가 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믿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 생명을 일으키는 영이면서 동시에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로 살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생명 사건은 곧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평화의 영을 따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기쁨에 참여하고 싶으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유와 해방을 맛보시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예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레벨:1]똑소리

2006.04.17 12:27:46

정목사님께서도 기도할 때 "~될 줄로 믿습니다"는 표현을 쓰시는군요.
저의 코멘트 안에는 어떤 가치판단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 동안 너무 익숙한 기도표현이 다비아에서도 보이기에......
나의 코멘트를 보고 정목사님께서 욕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레벨:18]은나라

2016.11.04 23:59:12

세례와 성령임재사건, 세례와 성령일치사건, 세례와 성령의 함께하심..이게 무슨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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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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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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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9일 ‘어록’3(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앞의 두 묵상에서 저는 온 천하와 목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목숨은 온 천하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삶의 능력으로 확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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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8일 ‘어록’3(2)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기독교 신앙은 온 천하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묵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묵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듯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몰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

6월7일 ‘어록’3(1) [3]

  •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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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7일 ‘어록’3(1)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위의 어록에는 ‘온 천하’와 ‘목숨’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대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온 천하를 무조건 나쁜 뜻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성실한 노력도 모두 온 천하에 속합니다. 예컨대 슈바이처나 데레사 같은 이들의 삶도 역시 온 천하입...

6월6일 ‘어록’2(5) [1]

  • 2008-06-05
  • 조회 수 1194

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6월5일 ‘어록’2(4)

  • 20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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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6월4일 ‘어록’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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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4일 ‘어록’2(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어제의 묵상에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병든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생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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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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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일 ‘어록’2(1)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말이 옳은가요? 우리의 세상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을 때까지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치열한 삶의 모습은 모두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는 노력들입니다. 돈을 벌고, 병원에 다니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학생들의 공부도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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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일 ‘어록’1(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내면적인 기준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만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그럴 때만 우리의 행위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는 허위의식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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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31일 ‘어록’1(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이런 질문 앞에서 저는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제 삶이 별로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열정도 별로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으니,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교회 생...

5월30일 ‘어록’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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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2142

2008년 5월30일 ‘어록’1(3)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어제의 묵상에서 거론된 ‘값싼 은혜’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개념은 마틴 루터의 ‘오직 은총’ 개념과 연결됩니다. 루터는 구원이 종교적 업적으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은총 중심적 구원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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