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9일 예수님의 말걸음 (3)

조회 수 2483 추천 수 23 2006.10.29 22:13:00
2006년 10월29일 예수님의 말걸음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막 3:3)

누가 손 마른 사람을 회당으로 데리고 왔을까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어 하던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의 장애 치유를 진정으로 바라던 친구들인지, 또는 예수님을 소문을 듣고 무언가 기대를 한 당사자인지 성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처한 형편만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회당의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이 손 마른 사람은 회당 분위기가 무언가 편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자기가 놓여 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겠지요. 그는 그런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다가 이런 자리에 오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창피만 당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 어정쩡한 순간에 이 손 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시키신 일은 그에게 별로 내키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 그의 수치인 장애를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더구나 그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예수님의 말걸음은 손 마른 사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때로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그 심층적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를 향해서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한 가운데 서라.”는 그 말씀은 우리를 어떤 세계를 보거나 만나게 하고, 나아가서 어떤 행동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은총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기 원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촉수(觸鬚)를 예민하게 작동시켜야 합니다.

[레벨:8]김인범

2006.10.30 16:35:22

그럴수도 있군요.
내가 손 마른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왜 안했는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예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런 은총이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삶에 말을 거는
그분을 향해 민감한 촉각을 예민하게 세워야 겠습니다.
참 좋은 깨우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인데
천호동 출신의 이창호 목사가 안부를 전합니다.
저와 아주 가까운 친구같은 사돈지간이지요.
이 목사의 동생과 제 여동생이 부부거든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30 18:53:42

김 목사님,
이창호 목사와는 청년회 때 같인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도 아주 가깝습니다.
지난 2004년 기독교사상 설교 심포지움 때도 그곳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지요.
언제 한번 함께 만나뵙죠.
이 목사의 여동생이라면 나도 보면 알 것 같네요.
이 목사 아버님 되는 분이 천호동 교회의 수석 장로이셨고,
이 목사 형제들이 모두 교회생활을 잘 했어요.
반갑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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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난, 죽임, 부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메시아 상이 이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부활’에 관해서 한 마디 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고난과 죽임이 예고되었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의 운명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명시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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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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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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