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옳음의 문제 (1)

조회 수 2455 추천 수 31 2006.10.31 14:52:46
2006년 10월31일 옳음의 문제 (1)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예수님의 질문은 군중들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문제가 늘 선과 악으로, 생명과 죽음으로 양분되는 건 아닙니다. 이 양자가 겹치기도 하고 그 경계가 모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늘 선택해야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후보자들을 완전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결국은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안식일 같은 종교문제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도 역시 이런 선택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89주년 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31일이 바로 루터의 비텐베르크 성당 대자보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그는 교황청이 실행하고 있던 면죄부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주장은 보기에 따라서 일리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개신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십일조와 일천번제 헌금도 이해하는 쪽으로만 본다면 일리가 없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목회적 마인드보다는 신학적인 투명성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진리와 거짓의 중간 자리를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교황 무오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도그마를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루터는 무엇이 옳으냐, 선택하라고 교황청을 향해 다그쳤습니다.
루터의 이런 투쟁은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갖고 있던 무소불위의 권력은 일개 시골 사제에 불과했던 루터를 공포에 떨게 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옳은 것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런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루터의 고백은 바로 진리가 제공하는 해방과 자유에 근거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바우로

2006.10.31 21:11:37

정 선생님이 꾸준히 올려주시는 성서묵상에 대해서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황무오설은 중세에는 없던 교리인 것 같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무오설이 정식교리로 인정된 것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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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11.01 00:36:43

교리로 인정된 것은 1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런 신학적 논조들이 충분히 개진된 상태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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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2일 ‘어록’6-1 [3]

  • 200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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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2일 ‘어록’6-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이틀 전의 묵상에서 저는 위의 본문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제자들이 살아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걸까요? 일단 바로 앞 절과 연결해서 본다면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6월21일 ‘어록’5-9 [4]

  • 200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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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1일 ‘어록’5-9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의 재림이 곧 세계 완성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일단 키워드는 ‘세계완성’입니다. 도대체 세계가 완성된다니,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완성된 것으로, 또는 완전한 것으로, 아니면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을 잘 이용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도...

6월20일 ‘어록’5-8

  •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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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0일 ‘어록’5-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온다.”는 것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재림신앙을 근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막 9:1)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기도 ...

6월19일 ‘어록’5-7 [4]

  •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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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9일 ‘어록’5-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고대인들이 왜 천사를 생각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들의 그림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라파엘의 천사 상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 손을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보는 천사의 그림이 저의 집에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라파엘에게는 하늘에 대해 관심이 참으로 많았...

6월18일 ‘어록’5-6 [2]

  • 200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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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6월17일 ‘어록’5-5 [2]

  •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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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7일 ‘어록’5-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는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구원도 결국 죽어서 천당 가는 정도로만 받...

6월16일 ‘어록’5-4

  •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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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6일 ‘어록’5-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한국교회에는 심판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마치 염라대왕쯤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태만한 자들을 유황불이 뜨겁게 타고 있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그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이지 실체를 말...

6월15일 ‘어록’5-3 [6]

  • 200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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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6월14일 ‘어록’5-2

  •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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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4일 ‘어록’5-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어록에 나오는 단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우리말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관된 것인데, 이 세상(에온)의 마지막에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인자가 단지 심판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소유한 분이...

6월13일 ‘어록’5-1

  •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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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3일 ‘어록’5-1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말씀을 앞에 둔 저는 지금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말씀이 말하려는 세계를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신앙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6월12일 ‘어록’4

  •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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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2일 ‘어록’4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7)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당연히 죽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

6월11일 ‘어록’3(5)

  • 20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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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1일 ‘어록’3(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목사들은 우선 자기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구절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목사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경험했으며, 이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명감은 사실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런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에 어...

6월10일 ‘어록’3(4) [4]

  •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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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6월9일 ‘어록’3(3) [1]

  • 2008-06-08
  • 조회 수 1376

2008년 6월9일 ‘어록’3(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앞의 두 묵상에서 저는 온 천하와 목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목숨은 온 천하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삶의 능력으로 확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

6월8일 ‘어록’3(2) [1]

  • 200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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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8일 ‘어록’3(2)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기독교 신앙은 온 천하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묵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묵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듯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몰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

6월7일 ‘어록’3(1) [3]

  •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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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7일 ‘어록’3(1)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위의 어록에는 ‘온 천하’와 ‘목숨’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대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온 천하를 무조건 나쁜 뜻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성실한 노력도 모두 온 천하에 속합니다. 예컨대 슈바이처나 데레사 같은 이들의 삶도 역시 온 천하입...

6월6일 ‘어록’2(5) [1]

  • 2008-06-05
  • 조회 수 1195

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6월5일 ‘어록’2(4)

  • 2008-06-04
  • 조회 수 1686

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6월4일 ‘어록’2(3) [1]

  • 2008-06-04
  • 조회 수 1324

2008년 6월4일 ‘어록’2(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어제의 묵상에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병든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생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

6월3일 ‘어록’2(2) [3]

  • 2008-06-03
  • 조회 수 1451

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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