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예수님의 화

조회 수 2749 추천 수 43 2006.11.03 08:41:06
2006년 11월3일 예수님의 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우선 짤막한 본문 비평이 필요한 대목이군요.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이 저들의 완악한 마음을 탄식하셨다는 문장이 먼저 나온 뒤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는 문장이 뒤를 따르고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그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루터번역본은 헬라어 성경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문장의 순서가 바뀐 이유는 번역자들의 편집 의도가 은연중에 개입된 게 아닐는지요. 예수님이 다짜고짜로 화를 내셨다고 하는 것보다는 먼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될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헬라서 성서의 순서에 따라서 예수님이 화를 내렸다는 사실을 먼저 짚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디 자기 일신상의 문제로 신경을 쓰시는 분인가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나셨겠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율법적인 태도에 화가 나셨겠지요. 그들에게는 안식일 율법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손 마른 사람의 실존이 별로 크게 와 닿지 않았으며, 따라서 선과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호소에도 귀를 막았습니다.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은 화를 낼 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아니 화를 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훼손당하는데도 화를 낼 줄 모른다면 그는 결코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정치, 경제 체제에 도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람을 마취시키는 종교를 향해서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는 거룩한 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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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강병구

2006.11.03 20:10:26

목사님, 선과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호소에 귀를 막고 살아가는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또 제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던 세계관들을 허물어 주셔서 감사해요.ㅋㅋ 예수님은 자기의 일신상의 문제로 신경을 쓰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죠? 저두 제 자신의 실존에만 묶여있거나 자기에 대한 관심에만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집중하고 싶어요.
목사님, 존경하고 싸랑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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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11.03 23:41:44

강병구 님,
ㅋㅋ 가 뭐에요?
웃음소리라는 건 알겠는데,
자기말이 멋적다는 건지,
아니면 내 말이 너무 뻔한 거라서 재미 없다는 말인지, ㅋㅋ
예수님이 일신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일신상 신경을 써야합니다.
이기주의에 찌들리지만 않는다면
일단 자기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아주 중요하답니다.
거창한 거보다는 그런 일상과 일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게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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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30일 ‘어록’1(3)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어제의 묵상에서 거론된 ‘값싼 은혜’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개념은 마틴 루터의 ‘오직 은총’ 개념과 연결됩니다. 루터는 구원이 종교적 업적으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은총 중심적 구원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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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9일 ‘어록’1(2)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든지, 예수님을 뒤따라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겠지만 그런 신앙의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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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5월27일 사탄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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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7일 사탄아!(8)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제목으로 나눈 지난 일주일간의 묵상이 너무 이론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 단락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전형적인 큐티 방식의 묵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저 책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본문이 분명하게 제기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

5월26일 사탄아!(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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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6 사탄아!(7)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짧은 묵상의 글에서 제가 번번이 위험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성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는 다루기 힘든 주제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본문을 다루든지 깊이 들어가다 보면 그 문제를 건드리게...

5월25일 사탄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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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5월24일 사탄아!(5)

  • 200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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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5월23일 사탄아!(4)

  • 2008-05-22
  • 조회 수 1572

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5월22일 사탄아!(3) [5]

  • 20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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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5월21일 사탄아!(2)

  • 200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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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5월20일 사탄아!(1) [2]

  • 20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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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0일 사탄아!(1)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베드로의 항변을,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항변인데, 들으신 예수님은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사탄아!” 병행구인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는 “사탄아!” 하는 예수님의 책망이 거론되지...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 20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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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난, 죽임, 부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메시아 상이 이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부활’에 관해서 한 마디 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고난과 죽임이 예고되었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의 운명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명시적으로 ...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 2008-05-17
  • 조회 수 1784

2008년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고난, 죽임, 부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베드로가 가로막았다는 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우리도 항변했겠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함께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아멘으로 화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린 ...

5월17일 케리그마(10) [3]

  • 20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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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7일 케리그마(1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과 부활을 케리그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이 케리그마에 매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신앙을 관념적이라거나 실천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케리그마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케리그마에 천착...

5월16일 케리그마(9) [2]

  • 2008-05-15
  • 조회 수 1613

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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