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시험 (3), 4월27일

조회 수 4682 추천 수 69 2006.04.27 23:42:06
2006년 4월27일 예수님의 시험 (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첫 번 시험은 다음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사탄의 요구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하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숫하게 받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무엇으로든지 한번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법합니다. 그 방법이 곧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호기심천국에 속한 질문들이지 영적인 질문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질문은 사탄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재(財)태크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시대는 사탄의 시대입니다. 아파트 값, 주식 값, 교육비에만 모든 흥미를 집중시키는 현대인들은 사탄의 친구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을 조롱하듯이 사탄이 던진 질문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좀 거칠게 말해서, 신자유주의는 바로 돌을 떡으로 바꾸는 일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탄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태를 어떻게 뚫고 살아가야 하나요?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사탄과 어깨동무하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고 시험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사탄의 요구를 영적인 요구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양식이 무엇인가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세속적인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무엇인지 좀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사람과 생태계를 살리는 질문이고, 무엇이 죽이는 질문인지를 구별하는 능력 말입니다.
사탄의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이 말씀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떡과 말씀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떡과 말씀을 같이 강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떡으로 사는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떡도 필요하고 말씀도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서로 떡을 나누어먹게 될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떡은 이만 하면 됐다고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곧 인간을 살리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돌을 떡이 되게 하는 경제적 마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관심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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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상훈

2006.04.28 05:00:38

목사님의 글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해서 다행입니다...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레벨:8]김인범

2006.05.24 09:53:15

오늘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합니다.
전에도 크게 은혜를 받은 말씀이었는데
그 의미를 자꾸 잊고 사단의 요구로 신앙을 보는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 내고 다시 읽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나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양식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사단처럼 '왜 주님은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는가'를 불만스러워하는 자신을 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받아지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면 서로 떡을 나눌텐데....
아니 오히려 '떡은 이만하면 됐어' 할텐데....
말씀으로 살아나는 나를 봅니다.

[레벨:18]은나라

2016.07.11 21:29:37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면..서로 떡을 나누게 된다."

기도를 하고 싶네요..

하나님, 많은 말씀을 듣고 읽고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바르게 받아들일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도와주세요..

[레벨:18]은나라

2016.11.05 11:28:52

요즘의 기독교 신앙을 갖는 많은 사람들은..

돌을 떡이 되게 해달라는 시험을 사탄과 손잡고 자신들과 사람들에게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일을 하고있는지 모르는거 같습니다. 특히 교회 목사들은 더더욱이요..

이것을 분별하는게 참 많이 힘들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말씀으로 되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전반적으로 도와주시기를 기도할수밖엔 도리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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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케리그마(9) [2]

  •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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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5월15일 케리그마(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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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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