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예수제거 음모 (1)

조회 수 2313 추천 수 27 2006.11.12 08:41:29
2006년 11월12일 예수제거 음모 (1)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바리새인들이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를 매우 심란하게 만드는군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아무나 죽이고 싶어 하는 불한당이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정도로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는 성서의 진술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 근방의 가버나움 저자거리와 회당이라는 아주 한정된 지역에서만 활동하셨을 뿐이지 그 당시 최고 종교권력인 산헤드린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몇몇 장애인과 환자를 고치고, 안식일에 관한 몇 마디 가르침을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제거되어야 할 정도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서기자의 과장이나 추론입니다. 예수님이 결국 종교권력에 의해서 희생당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아무리 초기이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극단적으로 적대시하고 죽일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천한 것으로 미리 예단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식일 논쟁은 하나의 작은 율법이 아니라 전체 율법을 대표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노골적으로 훼손한 예수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안식일 논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른 해석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안식일 논쟁이 결국 인류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소한 것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변하는 것, 그것이 역사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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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 ‘어록’2(2) [3]

  • 2008-06-03
  • 조회 수 1451

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6월2일 ‘어록’2(1)

  • 2008-06-03
  • 조회 수 1375

2008년 6월2일 ‘어록’2(1)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말이 옳은가요? 우리의 세상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을 때까지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치열한 삶의 모습은 모두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는 노력들입니다. 돈을 벌고, 병원에 다니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학생들의 공부도 역시 ...

6월1일 ‘어록’1(5) [1]

  • 2008-05-31
  • 조회 수 1461

2008년 6월1일 ‘어록’1(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내면적인 기준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만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그럴 때만 우리의 행위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는 허위의식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

5월31일 ‘어록’1(4) [2]

  • 2008-05-30
  • 조회 수 1521

2008년 5월31일 ‘어록’1(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이런 질문 앞에서 저는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제 삶이 별로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열정도 별로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으니,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교회 생...

5월30일 ‘어록’1(3)

  • 2008-05-29
  • 조회 수 2144

2008년 5월30일 ‘어록’1(3)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어제의 묵상에서 거론된 ‘값싼 은혜’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개념은 마틴 루터의 ‘오직 은총’ 개념과 연결됩니다. 루터는 구원이 종교적 업적으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은총 중심적 구원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

5월29일 ‘어록’1(2) [1]

  • 2008-05-28
  • 조회 수 2503

2008년 5월29일 ‘어록’1(2)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든지, 예수님을 뒤따라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겠지만 그런 신앙의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일단 ...

5월28일 ‘어록’1(1) [1]

  • 2008-05-27
  • 조회 수 1910

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5월27일 사탄아!(8)

  • 2008-05-26
  • 조회 수 1391

2008년 5월27일 사탄아!(8)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제목으로 나눈 지난 일주일간의 묵상이 너무 이론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 단락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전형적인 큐티 방식의 묵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저 책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본문이 분명하게 제기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

5월26일 사탄아!(7) [4]

  • 20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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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6 사탄아!(7)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짧은 묵상의 글에서 제가 번번이 위험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성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는 다루기 힘든 주제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본문을 다루든지 깊이 들어가다 보면 그 문제를 건드리게...

5월25일 사탄아!(6)

  • 2008-05-24
  • 조회 수 1331

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5월24일 사탄아!(5)

  • 2008-05-23
  • 조회 수 1366

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5월23일 사탄아!(4)

  • 2008-05-22
  • 조회 수 1576

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5월22일 사탄아!(3) [5]

  • 2008-05-21
  • 조회 수 1999

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5월21일 사탄아!(2)

  • 2008-05-20
  • 조회 수 1633

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5월20일 사탄아!(1) [2]

  • 2008-05-19
  • 조회 수 2404

2008년 5월20일 사탄아!(1)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베드로의 항변을,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항변인데, 들으신 예수님은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사탄아!” 병행구인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는 “사탄아!” 하는 예수님의 책망이 거론되지...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 2008-05-19
  • 조회 수 2062

2008년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난, 죽임, 부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메시아 상이 이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부활’에 관해서 한 마디 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고난과 죽임이 예고되었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의 운명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명시적으로 ...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 2008-05-17
  • 조회 수 1786

2008년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고난, 죽임, 부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베드로가 가로막았다는 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우리도 항변했겠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함께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아멘으로 화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린 ...

5월17일 케리그마(10) [3]

  • 2008-05-16
  • 조회 수 1643

2008년 5월17일 케리그마(1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과 부활을 케리그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이 케리그마에 매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신앙을 관념적이라거나 실천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케리그마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케리그마에 천착...

5월16일 케리그마(9) [2]

  • 2008-05-15
  • 조회 수 1615

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5월15일 케리그마(8) [2]

  • 2008-05-14
  • 조회 수 1669

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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