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158)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공관복음과 대비된다.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긴 연설문이 요한복음에는 여러 대목 나온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자기규정이 요한복음에는 흔하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행위가 중심이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말이 중심이다. 그 말도 대체로 관념적이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빅뱅 순간이라 할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했다는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따라서 이 로고스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로고스는 물론 예수다.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라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철학적인 사유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념적인 성격이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한다. 관념을 뚫고 들어가서 삶의 실체를 붙드는 작업이 요한복음 공부의 요체다.

위 구절에도 관념적으로 들린다. ‘나는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으면 간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예수가 죽는다는 사실만을 전한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인 사실을 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90년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어려웠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정복당했다. 유대교는 초기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예수 재림은 지연되고 있었다. 예수 없는 상황을 버텨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 초기 기독교는 예수 없는 상황을 잘 버텨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오늘 우리도 예수 없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개인적으로도 예수를 찾아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는 어둠의 순간도 있다. 실제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큰 어려움이 없어도 궁극적으로는 삶을 버텨내기 힘들다. 영혼의 한쪽이 비어있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하거나 두렵겠지만, 버텨내는 게 최선이다. 우리 영혼이 깨어 있는 한 생명의 빛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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