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4일- 예수님의 연민

조회 수 3866 추천 수 50 2006.07.04 23:41:05
2006년 7월4일 예수님의 연민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연민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볼 때 그런 연민을 느끼는 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런 연민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이런 연민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는 말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가깝게는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논쟁은 사실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서 이 두 입장은 완전히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만 본다면 전적인 타락이 옳겠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식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본다면 전적인 타락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으며, 그래서 원죄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연민이 예수님의 연민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민은 상황에 따라서 아주 쉽게 흔들리지만 예수님의 연민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거의 일방적으로 경제 일원론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연민의 능력은 거의 유명무실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왕따 당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는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걸 결사반대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단순한 연민만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분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연민은 분노에서 출발한다고, 아니면 최소한 분노를 수반한다고 보아야지요. 여기서 분노는 나병환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 공동체를 향한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에게는 나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당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몰아내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실제로 나병이 아닐까요? 그런 사회 구조에 안주한 채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도 역시 정신적으로 나병환자가 아닐까요?
얼마 전에 헌법재판소는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주는 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습니다. 법관들은 법 전문가들이니까 정확하게 법의 잣대로 판단했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들의 결정은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과 똑같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기초를 외면하고 법 만능주의에서 빠졌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나름으로 사회복지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들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단순히 사회복지와 봉사 차원이 아니라 기독론의 차원에서 사회 구조적인 불의 앞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사태 앞에서 일으키는 분노는 바로 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사회가 어떻게 마성을 드러내는지, 어떻게 나병환자를 소외시키는지 면밀히 뚫어볼 수 있어야겠지요. 연민과 분노는 우리에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허락할 것입니다.

주님, 나병환자를 향한 연민과 분노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레벨:8]김인범

2006.07.05 10:28:33

제 생각으로는
주님의 연민과 분노를 그렇게 해석하면
결국 인간 사회는 끊임없는 복수와 전쟁으로 구원이 아니라 더 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당장 눈에 보이는 나병환자의 그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안타까움과 그것으로 인한 연민을 일으키겠지만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실은 그 고통을 지지 않아도 되는데 지고 있는 인간의 타락한 죄의 결과들,
그것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근본적 고통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병 환자만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들조차도 예외가 아닌 것이 되겠죠.
그 전체가 나병 환자를 통해 투영되어진 연민의 대상이 아닐까요?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그 분노는 또 다른 인간 집단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묶고 있는 죄의 속성인 사단에, 곧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도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함인 거죠.
따지고 보면 나병 환자를 그렇게 몰아내는 것도 더 많은 사람을 살게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이었겠죠.
그러니 실상은 몰아 낸 그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인 연민의 대상인 거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결국 인간된 존재들은 항상 불안하고 여러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그것이 곧 타락한 인간의 실존인거죠.
그것에 대한 연민이 오늘 현실에 눈에 보이는 나병환자에 대한 연민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역시 그런 연민을 가질 수 있는 눈이 열여야 하고요.
그것이 세상이 보는 연민과 성도가 느끼는 연민의 차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7.05 23:44:03

김인범 목사님,
잘 보셨습니다.
기본적으로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하구요.
다만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정치적인, 경제적인,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연민과 분노가 다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굳이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화를 내신 것처럼이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처럼이요.
세례요한의 외침도 우리에게 필요하겠지요.
profile

[레벨:6]김동현

2006.07.06 10:59:04

최근 몇년간 헌재결정들의 추세를 보면, 헌재가 갈수록 소수자보호에는 소홀하고 정치적 판단에서는 보수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 결정도 정확한 내용은 결정문이 공개되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언론보도에 의하면 일반인의 진입 자체를 봉쇄한 것을 문제삼았다고 하니, 대체입법을 통해서 비맹제외원칙이 원래의 형태로 부활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헌재의 판단이라는 것은 원래 법적으로 정확하다는 개념을 상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 결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결정문들이 후보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정문마다 결론은 달랐을 것이고, 그 결론을 합리화하는 이유들이 제각기 있었을 테지요. 헌재결정의 이유라는 것은 결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헌재의 결정들은 법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행정수도 위헌결정이 정치적 지지여부를 떠나서 법리적으로는 매우 조악한 근거를 대었다는 점은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번 헌재의 결정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워집니다. 맹인들이 다른 직업을 얻기 어려운 사정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법리판단의 불가피성 때문이 아닌 정치적 선택에 따라 일반인에게 진입의 문호를 열어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니까요.

그러나 아직 결정문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친 판단을 하기까지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 섣부른 판단은 어려울 듯 싶고, 결정문이 공개되면 입수해서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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