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민중 (5) -민중과 한국교회-

조회 수 3309 추천 수 33 2006.07.18 23:29:46
2006년 7월18일 민중 (5) -민중과 한국교회-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세계 신학계에서 민중신학은 “Minjung Theology”라는 고유명사로 불립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 민중신학은 아직 청년입니다. 앞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지 아니면 열정 청년으로 끝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한국교회와의 연관이 중요하게 작용하겠지요. 왜냐하면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라는 바르트 진술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따라서 신학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무엇을 희망하고 있을까요? 불치병 치료, 물질적인 축복, 천당소망, 정신안정 등등,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언급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미 잘 알려진 것을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요소들을 큰 틀로 나누어볼 때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적인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초월적이라는 것입니다. 현실(내재)과 초월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내막을 살펴볼까요?
하나님 나라를 희망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그 나라를 그대로 살아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면에서는 세상 사람을 못지않게 세속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제관, 가족관, 직업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용하여 우리의 세속적인 관심사를 해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새해맞이 축복대성회나 특별새벽기도회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경계한 바알 종교 의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역사의식은 철저하게 초월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와 그가 이끌어 가시는 이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나름으로 십자가를 지고 여기에 참여하고 연대해야 할 사람들이 땅과 하늘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이 세계와 역사의 책임감으로부터 쉽게 벗어납니다. 그런 행태는 종말론과 전혀 차원이 다른 역사허무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 소종파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 이 세상보다는 하늘에 대한 열정이 강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퀘이커교도나 형제단처럼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철저하게 세속적인 관심이 대단하면서도 사회적 책임감을 벗어나기 위한 요령으로 초월을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민중은 속으로는 하늘나라를 기다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세상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도” 역시 모두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지금 교회의 민중들은 그런 걸 제공하는 교회와 그런 설교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강연하고 있는 릭 워렌 목사님도 이런 유형이겠지요.
경솔한 발언인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민중신학은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다른 이유는 접어두고, 민중신학이 말하는 그 민중들에게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력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둡다 하더라도 민중 신학자들은 그 신학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오늘 민중들의 행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데 일익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주님,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레벨:7]늘오늘

2006.07.19 03:52:20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정치에서라면 위의 구호는, 낯간지러워도 제 역할이 있는데,
by me, for me, of me...
종교에서는 위의 철칙이 god으로 은폐, 엄폐되어 있네요,

‘정치목사’ 운운하며 몸 사리던 교계가
무책임하고 무식한 정치적인 발언들을 쏟아내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치인도 아닌 그들을 심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투표를 대신하여 출석교인수가 그 잣대가 되겠군요.
그렇군요. 제 생각에도 민중신학은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저의 세대는 거의 최상급의 경악을 경험해왔습니다.
박정희의 서거, 중국과의 수교, 소비에트의 붕괴, 911 테러,
월드컵 4강, 한나라당의 압승, ...
이러한 격랑을 읽어내는 방식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민중의 움직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을 읽어내고 엮어냈던 레닌의
‘이론과 실천’은 철지난 폐품일까요 ?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잡다한 꼭두각시들의 위세에 짓눌려,
우리의 신앙 그리고 신학이 삶의 뒷구석에, 역사의 꼭두각시들 꽁무니에,
곰팡내나는 악세사리로 뒷짐지고 있어야 할까요 ?

현재의 세력배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지금 그대로 갈 수 없음을 알아채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누구와 가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
피안을 기다리는 차안에서의 할 일이 아닐까요.

[레벨:7]늘오늘

2006.07.20 06:27:36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으고, 이론을 정립하고,
과제를 설정하고, 전략전술을 구사하고, 등등...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와 가야하는지’
저의 글을 다시 보니,
교회가 정치조직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한 셈이네요. ^^;

[레벨:11]권현주

2006.08.08 16:24:01

목사님,
자기욕망의 도구로 하나님을 이용하며,
죽어서까지도 좋은 자리를 놓치지않으려는,
교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속물들의 경제관과 역사관을 들어
민중이란 이름으로 아우르는 이유를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교회전체의 문제이고, 자본주의의 욕망이 투사된 사회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민중신학이 만약 이런 속물들을 기초로 한다면
그 미래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민중신학의 체계나 대표적인 학자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민중이란 개념은
그 사회의 뿌리를 이루는 기초들일 것입니다.
시민(citizen), 다중(multitude), 국민(people), 대중(mass) 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어질 수 있겠죠.
사회구성이 복잡해지면서, 그 표현이나 사회적 역할도 달라지겠죠.

전체주의가 민중들의 환호위에 성립되었죠. 우매한 대중들이죠.
유럽의 68혁명,
우리나라의 민간정부의 시작은 자각한 대중들의 힘을 부정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지죠.

성서가 해방의 선포이기도, 억압의 도구로도 사용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억압적인 면만 부각시킨다면,
그것은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있다고 봐야할 듯 합니다.

성서의 내용이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하듯이
민중의 개념도
우매하기도,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그 역사의 자리에서 재해석되어져야할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민중에 대한 해석은
민중신학에 대한 것으로 한정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로서는
목사님의 평소의 균형잡힌 감각을 잘 알고있는 저로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민중신학의 이름으로 어떤 강압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 아닌가 짐작하기는 해봅니다.
만약 그랬다면
민중신학의 독단이거나 소수 학자들의 한계였겠죠.

그렇다고하더라도
민중의 개념에 대해 보다 유연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08 23:40:39

권현주 선생,
내가 민중개념에 대해서 경직된 생각을 한 것처럼 비쳤소?
내 표현이 한계인지 모르겠소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경직되었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자는 거였는데...
민중신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쪽의 목회자들과 끈끈한 연대감을 갖고 있소.
세 가지만 정리해야겠소이다.
1. 민중의 실체를 추상화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보아야하오.
개인을 거명해서 미안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 아무개 목사님이야말로
가장 민중적인 목사인지 모르겠소.
왜냐하면 그는 민중이 원하는 종교적 욕망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해서
맞대응하고 있으니 말이오.
어떤 사람은 그가 민중신학이 아니라 민중을 기만한다고 볼 수 있을 거요.
그에게는 복음이 아편으로 작용한다고 말이오.
그러나 그게 바로 구체적인 인간이오.
깨어있는 민중만 민중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말이 달라지는 거요.
2. 구약의 예언자들은 두 가지 부류요.
한쪽은 포퓰리즘에 기울어진 예언자이고,
다른 한쪽은 대중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만
관심을 둔 예언자요.
언제나 이런 두 종류의 예언자들이 활동했소이다.
예언자들은 왕실에 기울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중들의 요구만을 따르지도 않았소.
3. 신학은 단지 신학일 뿐이지 민중신학이 따로 있을 수 없소.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회의 마이너티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세상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민중신학이라는 일정한 속성의 신학이 아니라
그냥 '신학'이 가야할 길이오.
다른 한편으로 해방신학은 약간 말이 되오.
왜냐하면 해방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구원의 리얼리티니까 말이오.

ps.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교회 개혁은 가진 자들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없는 자들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니오.
전혀 다른 생명의 힘이 우리를 억압해 들어올 때만 그게 가능할 거요.
정치적인 문제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생각해보시오.
그 책임이 노무현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인 것 같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지역감정을 뛰어넘는다거나
개혁을 원한다거나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지 않소.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지, 즉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지,
구원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없는 것 같소.
(요즘 방학이라서 그런지 다비아 방문이 잦으시군....)

[레벨:11]권현주

2006.08.09 12:10:44

다비아 큐티 처음부터 모두 읽어오느라 열심히 오고있었는데
여전히, 또, 예외없이, 이 문제에, 걸리네요.
목사님과는 하도 여러번 반복된 논쟁이라,
그러면서도 달라진게 거의 없이 반복되어지는 어떤 패턴 같읍니다.

목사님,
3번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합니다. 멋진일이죠. 그래야만 하죠.

그런데
민중신학자가 아니라 잘모르긴하지만
적어도 짐작컨데, 민중신학이 전체신학의 특수한 형태, 또는 일시적인 역사시기에 필요했던,
일시적 형태로서, 전체신학의 범주안에서 자기 몫을 찾아 절치부심했을 듯 합니다.
만약 그렇지못했다면, 그 사실 자체가 비판받아야 합니다.
하위법은 상위법의 근본정신을 훼손하지않아야한다는 것과 같이요.
즉 민중신학은 전체신학의 범주하에있는
그러나 어떤 특수한 시기에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형성되었던 일시적인 또는 특수한 형태의 신학으로 이해되어질 수 는 없을까요?

그리고 1번의 전제,
즉 민중이라 전제하고계신 것이 너무나 편협하다고 말씀드리지않을 수 없읍니다.
속물자본주의와 그것과 결탁한 기독교기복신앙의 세례를 받은 자들로 민중을 가정하고있으시니까요.
오늘날
동원되어지고 쉽게 조종가능한 대중이 많다는 것 부정할 수 없읍니다.
이런 속물주의 꿰뚫어보아야합니다.
또 소위 귀족 노동자로 일컬어지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위험한 일 시키고, 자신들의 임금 계속 올려갑니다.
무슨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냐고요?
그래서 동종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비슷한 임금조건을 받아야한다는 원리를 골자로
노동자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위한
산별노조가 시작되었고, 뉴스에 나올정도로 숫자는 적지만, 정규직 - 비정규직 노조를 합께 설립한
회사도 없지않읍니다.
그리고 한나라당 지지자들, 민중범주에 포함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자들도 민중들입니다. 비판하는 자들도 민중입니다.
민중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2번,
예언자들이 민중들에게'만' 따르지도 않았다는 것은 양식있는 예언자라면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적 전통에대해서도 이런 기존의 민중개념으로는 안된다라는 관점은
'만'이라는 제한적 표현을 없애면 어떨까요?

만약 어떤 민중신학자가 '만'을 고집했다면, 역사의식의 편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부분을 비판받아야할 것 같읍니다. 즉 극단론자로서의 한계를 비판받아야겠죠.

민중의 개념은
일부 극단 민중신학자, 또는 속류맑스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좁은 개념에 갖힐 수 없는,
역사발전과 더불어 변화 발전해가는 역사주체개념
(사회학적 개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훨씬 넓은 층위가 있다는 점에서 구분되어지는)
으로 이해되어져야할 듯합니다.

타락한 민중에 대한 비판과 민중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속에서
자신을 조종하는 힘의 실체에 대해 알려하지않고, 노예로 안주해가는 대중이 많아지는 것을 보는 일은
슬픕니다. 자본과 권력의 부드러운 유혹이 달콤하기 짝이 없읍니다. 순응의 즐거움...즐겁게 노예가 되어가는 전대미문의 상황...
출구없는 벽속에 갖힌 것 같기도 합니다. 희망이 있을까요?

이것이 신학만의 문제가 아니듯, 민중신학의 문제도, 민중의 문제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근원적 반성없이, 하나님의 나라회복없이, 희망이 가능할까요?

타락한 민중은 역사의 퇴보를 나타낼 수는 있읍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민중의 개념이 문제적일 수 있어서
버리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요?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마이너리티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합니다.
이 마이너리티에 민중이 포함되거든요.

개념정의를 다소 의도적으로 축소할 때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넓은 신학적 이해를 돕기위해 민중개념을 이용하고있을듯한데
그 맥락을 다시 꼼꼼히 살펴볼 것입니다.

혹시 제가 놓치고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살펴볼 것입니다.
목사님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드리고싶습니다.
하도 여러번
비슷한 논쟁이 반복되었기때문에, 이제는 보다 진전된 어떤 발견이나 정리가 된 경우가 아니면
문제제기도 하지않아야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이문제에 관해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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