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 영적인 인식 (2)

조회 수 2709 추천 수 28 2006.08.09 23:05:36
2006년 8월9일 영적인 인식 (2)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막 2:8)

예수님이 서기관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인식하셨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에게 독심술(讀心術)이 있다는 뜻일까요? 웬만큼 정신적인 훈련이 된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예수님도 분명히 독심술 비슷한 능력이 있었을 겁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그가 살아온, 또는 경험한 범주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독심술로 보는 건 예수님을 오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에 사람들의 마음이 읽혀졌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런 것에 의지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 건 심리치료사들의 관심입니다.
“예수께서 중심에 아시고”라는 본문도 어떤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묘사가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의 해석입니다. 아마 중풍병자 치유 사건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런 해석이 첨가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기자는 없는 이야기를 여기에 편집했다는 말인가요?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성서읽기에서 중요한 시각은 성서 텍스트가 객관적인 fact를 전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으로 해석된 event를 전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적도 역시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입니다. 성서가 기록되던 그 시대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적 이야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축귀와 치병이, 그리고 자연의 기적이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대전제 아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읽을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늘 그 본문을 읽은 독자들인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려는 핵심을 찾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아셨다는 말은 단순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지평에서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만 집중했습니다. 마치 시인들이 항상 시에 대해서 생각하듯이, 화가들이 그림만 생각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이며, 평화이며, 해방인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이 그곳에 앉아있었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앞에서 서기관이 이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전승과 연관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뜻이지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사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 이외의 것들은 사실 지엽적인 것이며, 어떻게 보면 군더더기입니다. 예컨대 복지사회 건설, 민주화, 노동해방 등도 역시 지엽적인 것입니다. 오해 마십시오. 이런 게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과 구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해명하고 변증하는 일은 다른 것들과 더불어서 함께 다루어도 될 정도로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인간과 세계의 현실 및 그 미래를 무시한 채 이것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인식’은 하나의 사실,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뚫어보는 능력입니다.

주님, 우리의 영이 궁극적인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아멘.

[레벨:11]권현주

2006.08.10 13:12:14

드디어 저도 밀린 것 읽은 후 다비아 매일 큐티에 합류하게되었읍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가복음을 이렇게도, 꼼꼼한 읽기와 묵상을 통해 접근하는 목사님의 방법을 통해,
하나의 전형을
경험하게될 것 같읍니다.
성서공부의 중요한 지침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제가 지엽적인(?) 것에 걸려들었는데요)
여러 사회운동이 하나님나라와 비교하여 지엽적인 것은 분명하고도 당연합니다.
어느 특정 역사시기를 대상으로할 수 밖에 없는 사회학이란
전인류역사 뿐 아니라
사후세계까지도 아우르는 신학의 일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때문이죠.
이런 당연한 사실을 다시 언급함으로서
사회학이 전부인것처럼 극단적으로 치달아가는 어떤 사회운동에 대해 일정정도
비판을 하시는 것 이해가 전혀되지않은 것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그 방법적이거나 정도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 정도에 머물러야지 존재자체를
거론하는 것은 재고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자본주의의 교묘함은 더욱 철저해지고있고
그래서
복지사회, 민주화, 노동해방은 더욱 멀어져가고있읍니다.
그 결과로
더욱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변해가는 민중들이 많아지고있고,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할 수없을정도로
사회는 다원화되어지고 있고, 그만큼 개방된 사회에 사는 듯 환상을 갖게되죠.
조종하는 손의 실체는
더욱더 부드러움을 가장합니다.
이런 사회 속의 무기력한 대중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이 무기력의 실체를 드러나게 할 일련의 사회운동에대해서 그 극단성과 치밀하지못함을 언급하면서
오해를 불러옴직한 표현들을 하는 것이
과연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인가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많고많은 여러 사회적 군더더기들 중에서 특히 이 셋을 언급하셨읍니다.
왜 다른 것이 아닌 이것이 선택되었는가 라는게 제가 이 글을 쓰게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복지사회, 민주화, 노동해방은 전부가 될 수 없읍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가 사라지고있기때문에 민중들이 더욱더 힘들어지고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읍니다.
내가 하나님 빛의 근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통로로서 중요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종말에가서야 드러나겠죠.
그러나
의미있는 사회운동을 통해서도 일부 드러나겠죠.
사회운동에 대한 언급이 이런 맥락에서 반드시 사용되어져야
본문의 의도가
제대로 드러나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질 않읍니다.
물론 마가복음 전체에 대한 감각이 없는 저로서는 이에 대한 해답도 유보해두어야하겠네요.

제가 부차적인 단순한 예로 들어진 것에까지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 이유는
비교적 철저한 사회분석을 하는 크리스쳔들이 드물다는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격렬하게 표출되어지는 갈등때문에 그 폭력성에 시야가 고정되어
그것이 자리하고있는
모순자체를 간과해버리고, 그 결과, 자신을 더욱 옥죄는 편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실어주는 많은 경우를 보면서,
놀랐읍니다.
그런데 어느정도는
제가 아는 크리스쳔들 중에는
어떤 사회이론에 대하여 철저히 연구하기보다는 그것이 사용되어지는 맥락에
따라, 아니면 그 이론에 대한 어떤 신학자의 해석에 따라, 그 이론을 다 알고있는 듯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소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저의 염려는 많은 부분
사회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크리스쳔들이 받을 수 있는 그 맥락의 효과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염려가 기우이기를 바랄따름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10 23:42:10

밀린 다비아 큐티를 모두 읽었다니,
따분한 책 한권을 '책떨이' 한 셈이군요.
권 선생이 짚은 건 내가 말하려는 주제의 핵심이 아니네요.
복지, 민주화, 노동 문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언급하지 않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현실안주, 경쟁심 등등을
인정한 것도 아니구요.
그런 문제들은 사회과학적인 시간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거에요.
다만 내가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묵사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부각하려는 거죠.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
사물을 보는 신학자들의 눈은 나이브하게 보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먹고, 마시고, 쓸 것을 하나님이 허락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시각도 보기에 따라서 역시 아주 나이브하지요.
그러니까 이런 걸 서로 비교하면 대답이 안 나와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성서적 입장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구체적인 문제를 사회과학적으로 풀어가야겠지요.
교회 마저도 사회과학에 근거해서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죠.
그렇게 하다가는 결국 복지, 민주화, 노동운동이
교회에 의해서 약화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모든 종교의 근본은
이 세상의 일들을 잠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잠정성!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문제가 무의미하다거나 초월해야한다거나
이원론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사실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잠정적인 제도에 불과합니다.
결혼 제도도 그렇고, 가족제도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모든 건 잠정적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잠정성 안에서 최선을 찾아가는 게 옳은 방법이 아닐까요?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귀한 가치와 이념이라고 하더라도 절대화하면
그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이미 사회과학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복지, 민주화, 노동문제를 약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날씨가 계속 덥네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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