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6일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람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막 4:12)

오늘 본문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메시아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는 어제의 말씀은 우리가 따라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어떤 일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한다는 오늘의 말씀은 따라가기가 곤란합니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책임을 그 사람들에게 돌릴 수 없겠지요.
이런 논리의 모순은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도 나옵니다. 야훼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파라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성서의 이런 표현들을 여러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주변의 역사, 그리고 모든 자연현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파라오가 왜 모세의 요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았는지 골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기자들의 진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불성설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어긋나게 만드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성서기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인 사람들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또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오묘하다는 의미입니다.

breathe

2007.02.06 08:47:36

아멘,..

목사님,
구약 다 읽고 지금 신약 읽기 시작했는데요, 어제 마태복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보지 못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1절로
'성령에 이끌리시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라고 한
성경구절이 생각납니다.
저도 도보신자로 살 때는 보이지 않던 구절이 어느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행위의 의미를
목사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음미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2.06 08:57:04

하나님 통치의 비밀, 그 요묘막측함, 그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말을 잊을 때,
그때부터 우리의 영성이 제 길을 가는 거겠지요.
바로 그 하나님을 맛본(?) 사람들은 언어와 사유의 궁핍을 느낍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까,
창조, 선택, 예정, 하늘, 은사, 종말, 영생, 영광 등등,
신앙적 언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 그런 개념에 다 들어올 수 있나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또는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가 드러나는 분을
이 역사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겠어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 만큼만 이해하고,
그걸 믿고,
그걸 희망하고,
더 나아가서 그걸 사랑하면 살아야겠지요.
좋은 하루...

[레벨:1]똑소리

2007.02.06 10:28:27

"파라오가 왜 모세의 요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았는지 골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ㅡ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막았다는 것입니다ㅡ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석이며 동시에
이 해석은 개인의 해석이 아닌 공동체의 해석이란 말로 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breathe

2007.02.06 21:03:12

저는 목사님 설교하신 내용으로 아멘하고
큐티로 아멘하고
신세를 너무 집니다.
제게 분명한 기도제목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2.06 23:33:44

똑소리 님,
오랜 만입니다.
어디 출타하셨나 했더니 옆에 계셨군요.
해석 맞습니다.
아무렇게나 해석했다는,
요즘 설교자들이 하는 식으로 주관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 아닌 건
아시겠지요?
이 역사는 해석의 역사입니다.
그 안에 종교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물리학도 들어갑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7 11:44:14

"야훼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파라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게 아닐까요?성서의 이런 표현들을 여러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주변의 역사, 그리고 모든 자연현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파라오가 왜 모세의 요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았는지 골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이 말씀에 대해 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두 가지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함
2. 바로가 스스로 강팍하게 됨
이에 대해 롬 9;1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1번에 대한 설명인 것 깉습니다. ㄱ르ㅓ나 그렇치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마 5:46에 보면 하나님은 해, 즉 빛을 악인에게나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겨울에 얼음이 꽁꽁 언 못을 비추고 있습니다. 빛이 나면 얼음은 녹습니다. 그러나 그 주위의 언 땅은 계속적으로 열이 가해지면 땅은 더 단단하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게습니다만.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쪽이 사랑으로 받느냐 그롷지 않느냐는 그 사람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팍함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팍해졌지요. 강팍해 진 것을 사람쪽에서 보면 "스스로"이고 하나님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사랑,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받아 들이는 우리가 그 사랑을 곱깝게 받아들이느냐 진정으로 받아들이느냐 그것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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