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일- 세리와 죄인들 (1)

조회 수 3612 추천 수 17 2006.09.02 23:02:32
2006년 9월2일 세리와 죄인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본문에 세리와 죄인이 병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세리와 죄인이 별 다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은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조세는 로마 황제의 국고로 들어가지만 관세는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로데 안티파스의 금고에 들어갑니다. 관세는 세금청부업자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징세가 남용되고, 그로 인해서 세리들은 백성들의 원성을 많이 샀습니다. 그들은 사기꾼으로 간주되었는데, 레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밥을 드시던 레위의 집에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아마 레위의 친구들과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죄인들이 모였겠지요. 여기서 죄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리를 비롯해서 이방인, 창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겠지요. 또한 천형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사기꾼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고, 그의 집에서 밥을 먹었으며,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렸다는 건 파격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를 따르던 많은 죄인들에게 잘못된 삶을 고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하고 가르치지 않고, 그대로 어울리기만 한 했을까요? 이게 세례요한과의 차이입니다. 요한은 엄격하게 도덕적인 설교를 했는데, 예수님은 그저 임박한 하나님 나라만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도덕적인 변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변화된 삶이 아니라 은총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겠지요.

[레벨:7]

2006.09.03 00:22:54

목사님,
은총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면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기꾼, 창녀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설까요.. 아니면 계속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만 할까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외부적 변화를 일으킬까요, 내부적 변화를 일으킬까요.. 아니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궁금합니다.

[레벨:0]서우정

2006.09.03 16:55:18

오랫만에 다비아에 들렀습니다. 게을러서..... 그러나 여기에 언제나 생동감이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은총으로 받아들인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로 나타날지는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할 각자 개인의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삭개오가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을 4배 갚겠다고 했을 때 주님이 구원을 선포하셨는데..... 이것이 모든 세리들이 구원을 받기위한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선택에 각자가 책임을 져야하니까요^^
전 개인적으로 세례요한 보다는 예수님의 모습에 끌립니다.

[레벨:1]똑소리

2006.09.03 17:36:55

지나가면서 한 마디 거들어도 괜찮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굳이 누가 떠나라 떠나지 말라 닦달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선택하고 가야할 길이 어딘지 알지 않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건,
자기의 삶의 토대와 운명을 오롯이 하나님께 걸어두겠다는 결단인데
예수에게서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이 과거의 체제에서
계속 현상유지하면서 그 자리에 머무르는게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변화라는게 외부적, 내부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시적인 사건이 아닐까요?
하여튼 저로서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치고
자기 내면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9.03 23:40:27

어려운 문제군요.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그의 통치를 맛본 사람은
이전의 삶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늘 그런 거는 아니겠지요.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전의 삶에 대한 판단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세리가 원성을 받기는 했지만 모든 세리가 그런 거는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예수를 만났다고 해서 무조건 세리를 그만 두는 거는 아닙니다.
창녀직이라는 게 별로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거는 일반적일 판단일 뿐이지,
개인의 구체적인 삶으로 들어가면 그런 일반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모파상의 <비계덩어리>가 생각나는군요.
창녀였던 그녀는 수녀, 교장, 사업가보다 내면적인 영성이 훨씬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창녀로 살아도 역시 거룩한 여자입니다.
복음은 어떤 삶의 외면적인 삶을 교정해나가는 힘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건입니다.
자기 삶이 변하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똑소리 님이 내면에 혁명적인 변화를 말했군요.
그 혁명적인 변화라는 건 하나님이 죄인까지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게 되는 충격입니다.
그래도 그런 충격이 있으면 삶이 변화할 거 아니냐 하는 말이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체적인 삶은 일반론으로 재단될 수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개인 개인은 다 다른 삶을 삽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해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성령과
한 개인과의 내밀한 관계 안에서만 판단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설교는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주 도덕적인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 있습니다.
설교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생명활동과 조우하게 하는 데만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내일의 <다비아 큐티>에서 조금 정리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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