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조회 수 2914 추천 수 32 2006.09.04 23:29:08
2006년 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예수님 주변에 세리와 죄인들이 늘 함께 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그들을 모범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과 설교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마음을 열라는 초청이지 그들을 쓸 만한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훈계가 아닙니다. 초청과 훈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초청은 초청의 주체에 중심이 놓여 있다면 훈계는 훈계의 객체에 중심이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관건이라면 후자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삶과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지만 주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초청과 훈계를 구분하지 못할 때 설교는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잔소리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탕자의 비유”를 봅시다. 빌리 그레함 목사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많은 설교자들이 탕자의 변화된 삶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청중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도박, 마약, 술, 담배를 끊으라고 설교합니다. 이런 설교는 잔소리이고, 더 심하게 말하면 코미디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는 탕자가 회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설교자들이 끊임없이 청중들을 모범생으로 만들기 위해서 닦달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래와 같은 본회퍼의 진술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영적인 잔소리꾼, 지겨운 수다쟁이가 되지 아니하고 주의 모든 규례를 선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체험과 수행,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본회퍼의 시편명상, 153쪽)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리스도교 신앙과 설교에 윤리적인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정직한 삶을 가르쳤고, 신약의 서신들도 역시 그런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만 고도의 윤리적 감수성을 유지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런 윤리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의 범주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존재와 통치의 신비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신비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않고 생명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초청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적인 개념으로 말한다면,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판단과 생각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가장 궁극적인 존재의 세계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계를 미리 맛본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초청을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그대로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살았다는 건 그가 이런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대했다는 의미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복음을 따르는 변화된 삶(본질)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존재)이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안에 들어있는 가장 궁극적인 성격이 그것입니다.

[레벨:1]똑소리

2006.09.08 10:40:38

목사님!
요한복음을 보면 돌로 치려던 무리가 돌아간 후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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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09 00:16:59

질문이 막연하네요.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은혜롭게 읽어야지요.
요한복음은 특별히 해석이 많이 필요한 목음서입니다.
가장 늦게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헬라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이 여인이 생명을 경험하려면 그런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죄인지 우리가 단정하기는 힘들지만요.
그 사건에서의 핵심은 위의 언급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에요.
결국 복음과 은총 앞에서 인간의 구조와 질서는 맥을 못추는 거죠.

[레벨:1]똑소리

2006.09.09 09:28:02

복음과 윤리의 경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목사님은 자주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도덕적, 혹은 모범적 삶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기에
제가 위의 질문을 던져 본 것이예요.

[레벨:0]서우정

2006.09.20 22:16:53

저는 "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요한복음5장인가요?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도 주님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언뜻 생각하기에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주문을 왜 하셨을까요? 불가능하다면 주님은 그것을 주문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원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냐고 반문한다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셨고 가능하기에 명령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괜히 쓸데 없는 잡소리가 들어갔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가면 죄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모르고 교만하고 자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창녀가 그 후에 그 일을 그만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 두었다고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 즉 하나님을 인식하라. 또 다른 말로 내 안에 거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38년된 중풍병자는 이것을 실패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고자질했으니까요...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38년된 중풍병자가 낳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흥분을 하는데 제가 보면 그는 더 심한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물론 다시 중풍병자는 안되었겠지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 않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라 제가 말할 수 없지만) 생각됩니다. 그 창녀는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깊이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저의 바램입니다.
예수님도 도덕적 모범적 삶에 대한 제시한 적은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그러나 그것은 율법의 핵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본질을 찾도록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들은 그것 조차도 또 다른 율법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는 것도 의미를 제하고 행위로만 따르는 ...... 저를 포함해서 인간은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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