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 진설병

조회 수 5266 추천 수 41 2006.10.12 00:02:35
2006년 10월11일 진설병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6)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1-6절의 다윗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먹을 걸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마침 일반적인 빵은 없고 제단에 올린 떡, 즉 진설병만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거라도 달라는 다윗에게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을 다윗에게 내준 이유는 그 당시 다윗의 처지가 아주 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부마이자 군사령관이었던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하루끼니조차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사무엘상에는 제사장의 이름이 아히멜렉인데, 여기 마가복음에는 아비아달로 되어 있군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지 진설병 사건에서는 사실 다윗보다는 아히멜렉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아히멜렉이 진설병을 거절했다면 다윗은 아무 소리 못하고 물러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다윗의 입지가 아주 어려운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히멜렉은 다윗의 생존을 위해서 진설병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진설병과 같은 종교형식은 사람의 생명보다 하위개념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전통과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전통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의 편의에 따라서 그런 것들을 간단히 해체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종교형식은 생명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종교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릇은 음식을 담는 역할이지 음식 자체는 아닙니다. 그릇이 그런 역할을 넘어서서 음식이 되려고 한다면 종교는 생명력을 잃게 되겠지요.

[레벨:1]똑소리

2006.10.12 09:24:45

"종교형식은 사람의 생명보다 하위개념"이란 표현에 동감입니다.
그렇다면 법궤를 운송하다가 급살맞은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구약성서 기자 역시 사람의 생명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았을텐데 말입니다.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고대인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성서기자가
그런 현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한 것일까요?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느낌인데요.
1년에 한번밖에 그것도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일반인이 들어갔다고 해서 진짜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글을 올리면
목사님은 아마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타박할지도 모르겠군요.

[레벨:6]또 하나의 나

2006.10.12 11:12:33

저도 위의 똑소리님의 질문이 궁금하네요.법궤사건과 진설병사건이 다른것인가요.
요즈음은 머리가 복잡하네요.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되니. 이게 다 다비아를 만난 덕분이죠^^

[레벨:5]이택환

2006.10.14 23:09:23

법궤는 지성소 안에 있는 성물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외경(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누미노제)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었습니다.
레위기 16:2에는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무심코 들어왔다가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지요.
진설병 또한 거룩한 성물이었기에 제사장만이 성소에서 취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설병은 법궤와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물이 결코 아닙니다.
성물이라고 해서 접촉하는 사람이 다 죽는 것도 아니고(하나님이 그렇게 융통성없는 분은 아니시지요),
법궤와 같이 성물 중에서도 특별한 성물에만 제한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금기사항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모세나 이사야 조차도
죽음의 외경(누미노제)에 직면했습니다.
법궤를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진설병에는 물론, 아무나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해진 제사 법이 있는데, 아무나 먹어서는 안되었겠지요.
한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이 제사법을 어기고 진설병을 먹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제정신이 박힌 사람 가운데에는 "다윗이 먹었으니까 나도 먹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멀쩡한 정신으로 "다윗이 먹었는데 내가 왜 못먹냐"고 하셨지요.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다윗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마 22:45).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 "무리들이 다 놀라서 예수를 '다윗의 아들'(=메시야)이 아니냐"
며 크게 놀라고 있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2:23).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종교 제도와 형식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종해야 할 대상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것들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보다 더 상위에 두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신의 과제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보다 더 위에 두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정 목사님께서 더 좋은 설명이 있으실텐데, 주제넘게 먼저 나서보았습니다.
목사님께 양해를 드리며, 두분께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레벨:1]똑소리

2006.10.12 14:37:40

이택환님!
정성스레 달아주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구약성서 율법에 나타나는 법궤가 갖는 종교적 상징성과
그 의미를 몰라서 위의 질문을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에 대한 경외심과 거룩성을 나타나기 위해서
법궤에 한해서는 레위인 외에는 접촉할 수 없도록 한 규범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법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죽음이
실제로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법궤를 레위인만 접촉하게 한 규정이 종교의 형식이라면
일반인들이 법궤를 만졌다고 이유로 생명이 파괴당했다는 논리는
가장 본질적인 생명보다 형식이
더 상위개념이 된다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이죠.
저는 그게 궁금했던 겁니다.
법궤를 운반하는 과정에 일어난 불상사를 성서기자가 왜 그런 방식으로 기록했을까요?
혹 당시 제사장(레위인)그룹들의 권위나 체제유지를 위한 의도는 없었을까요?

[레벨:5]이택환

2006.10.12 16:32:20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요(삼하 15:12).
이 말은 사울이 자기 성취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형식을 무시한 자기 방식의 예배를 드렸을 때,
사무엘을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형식(레위기 제사법)을 따라 예배를 드려야지,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자기 방식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후로 하나님의 길(형식/방법)에서 벗어난 사울이 몰락하게 되지요.
사울 외에도 구약에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큰 화를 당한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레 10:2), 웃시야 왕의 문둥병(대하 26:19)...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했던 웃사와 아효의 죽음도 그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수레를 이용한 법궤의 운반은 매우 편리한 방식이었을지는 몰라도,
율법이 정한 하나님의 방식의 법궤운반법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다시 가져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율법이 정한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사람들의 어깨에 메고
다윗성까지 무사히 가져오지요(큰 기쁨 속에서!).
삼하 6장의 해당 본문을 잘 읽어보시고, WBC 등, 관련 주석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사법의 형식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서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림자를 실체로 붙잡은 사람들이었구요.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그림자가 주는 교훈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전통적)인 형식 안에 내용이 보존된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라 아닌 완성자이셨지요(새 계명으로).
오늘날 현대 기독교가 형식을 깨 버림으로써, 자신이 담고 있는 내용(복음/하나님 나라)
마저도 상실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입니다.
때로는 이게 예배인지 쇼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더군요.

저는 제사장 그룹 등, 특정 그룹의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이 쓰여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면이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촉구하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라면 마땅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12 23:39:13

수레에 실린 법궤에 손을 댄 사람들이 죽는 사건이라...
아무래도 똑소리 님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된
<국제성서주석>을 한질 사야겠습니다.
신구약 합해서 5,70 권이 되니까 좀 비쌉니다.
그러나 똑소리 님의 궁금증을 아주 많이 풀어줄 테니까
비싸도 한번 구입해보세요.
그게 무조건 정답을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길을 제시해주는 건 분명합니다.
내가 위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그런 주석집 등을 참조해야 하는데,
지금 그럴 형편은 안 돼니까
상식적으로만 대답할께요.
우선 개론적인 문제.
성서는 해석입니다.
내가 늘 말하는 겁니다.
사실에 대한 실증적 보고서가 아니라
성서기자들의 역사해석입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했을 때 손을 댄 사람들이 왜 죽었을까요?
법궤가 사람을 살상할 정도로 무거웠는지,
아니면 어떤 사고였는지,
그건 더 생각해봐야지요.
고대의 운반체계를 생각한다면 아마 사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걸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징벌로 해석했습니다.
그게 옳은지 아닌지는 더 판단해야지요.
상식적으로 봐서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손으로 바치는 건 옳은 행동 아닌가요?
그런데 뭔가가 잘못되어서 그 사람들이 죽어버린 거에요.
이 뒤의 문제는 똑소리 님이 알아서 생각해보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12 23:42:24

이택환 목사님,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운영하시는 까페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것에 저의 설교비평 등등이 실려 있더군요.
맞지요?
까페 내용도 전반적으로 매우 학구적으로 되어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까페와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던데요.
모든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레벨:5]이택환

2006.10.13 08:14:55

정 목사님!
신학교를 다닐 때에도 그랬지만, 목사가 된 후에도 몇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교회와 사회, 신앙과 경제, 목회와 윤리 등의 현실에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저 열심히 변죽만 울렸지요.
이제 복음의 핵심을 가르치기 위해 청년들이나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
소수만이 관심을 보이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매일의 큐티와 기도의 응답과 단기선교 등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비전에 더욱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저 자신처럼 하나님의 관심보다는 오늘의 자기 과제에 더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
열심 있는 신앙인일수록 교회에서 제자 훈련등을 통해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 견고한 틀을 깨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종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는데 있어서 정 목사님께 배우는 바가 실로 큽니다.
정 목사님의 글을 홈페이지에 옮겨 실으면서 먼저 자신이 배우고,
또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저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고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목사님의 다비아 사역은 충분히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늘 감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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