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심리학

조회 수 5280 추천 수 2 2010.09.13 23:19:10

 

     오늘 그대에게 책 한권을 소개하오. <신이 된 심리학>이오. 지은이는 폴 비츠이고, 역자는 장혜영이고, 출판사는 새물결플러스요. 요즘 새물결플러스에서 좋은 책들을 많이 내고 있소. 폴 비츠라는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 이름이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미시간 대학교 학부를 다녔다 하오. 그 뒤로 석사와 박사까지 심리학을 전공한 분이오. 지금 70 대 중반의 나이인 것 같소.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은 자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미국의 현대 문명과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이오. 이런 현상의 기초가 바로 심리학이라 하오.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심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부정처럼 들리겠지만, 그가 심리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심리학이 종교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오. 그가 말하는 다섯 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소. 이 명제만 기억해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소.

 

1. 종교로서의 심리학은 존재할 뿐 아니라 미국 도처에 강력하게 자리한다.

2. 종교로서의 심리학은 종교를 떠나서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받을 수 있다.

3. 종교로서의 심리학은 철저히 반(反)기독교적이다.

4. 종교로서의 심리학은 학교와 대학, 그리고 사회 제도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데, 그 자금은 수백만 기독교인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해 세금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법적 문제를 야기한다.

5. 종교로서의 심리학은 수년 동안 개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들을 파괴해왔다. 하지만 이 세속적 학설의 논리가 최근에야 이해되기 시작했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숭배의 공허함을 발견하게 되면서 기독교는 의미와 생명을 제공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다.(15 쪽)

 

     폴 비츠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나도 기본적으로 동의하오. 기독교 신앙이 마치 처세술처럼 다뤄지는 교회 현상이 바로 그것이오. 심리적인 위로를 얻거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이오. 이런 일들은 미국과 한국교회에 비일비재하오.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이 대표적이오.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자아성취의 수단이 되고 있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찬송 노랫말도 그 토대는 비슷하오.

     폴 비츠는 심리학의 사도들로 다음 같은 이들을 꼽았소. 칼 융, 에리히 프롬, 칼 로저스, 에이브러햄 매슬로, 롤로메이가 그들이오. 비츠의 설명을 여기서 다 전할 수 없소. 재미있으니 기회가 되면 직접 읽어보시오. 그 핵심은 ‘자아주의’요. 이런 심리학은 자아를 강화하는 것에 목적이 있소. 그가 예로 든 기독교 전통이 여럿이 있는데, 그중에 경건주의도 포함되오. 그가 말하는 경건주의는 아마 각성운동을 가리키는 듯하오. 부흥운동과 맥이 닿소. 이런 기독교 운동이 왜 문제인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과 계시보다는 인간의 종교경험에 토대를 둔다는 사실이 그것이오. 결국 이런 기독교 운동은 자아실현이라는 거대한 현대주의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소. 아무리 기독교적인 용어로 포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집중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인간을 파괴하기 마련이오. 왜냐하면 자기집중이 죄이기 때문이오.

    폴 비츠는 문명 비판자요. 그의 안목은 정확하오. 특히 미국교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그의 분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소.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폴 비츠가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오.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오.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정통주의자라고 하는 게 좋겠소. 이런 경향이 그의 책을 읽는데 크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거요. 이 책에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간단하지만 두 번이나 거론된다오. (2010년 9월13일, 월, 높은 구름, 푸른 하늘)


[레벨:18]눈꽃

2010.09.13 23:36:25

감사합니다

 당장 주문이요~~

[레벨:16]안희철

2010.09.14 01:32:29

심리학과 그것으로부터 배태된 다양한 심리기술방법론들이
목회자들의 목회철학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목양의 진정한 가치와 원칙은 어디다 팽개쳐놓고서 말이죠.

마치 심리기술애용이 교회를 세속화로부터 막는 길(=부흥)이라고 여기는 듯 합니다.

저 책에서 말하는 바와 정반대겠군요.

군목 교육받던 때, 갖가지 심리학적 방법론들을 배운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3년 내내 써먹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군대와 종교계의 심리학을 통한 야합일겁니다.

군에서 종교계가 살아남는 길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세속화를 막고 신자를 지켜내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미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세속화의 길이라는 걸 모르고 말이죠.

사실 세속화 문제는 일찍이 서양에서 한물 간 얘기겠지만

한국에서는 좀 더 본격적이고 긍정적으로 다뤄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복지나 생태 등의 문제에 종교계가 조금 더 발을 들여놔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profile

[레벨:43]웃겨

2010.09.17 13:12:23

목사님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올리신 글만 보아서는

 폴비츠의 문제제기가  좀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위의 자아심리학자들과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같은 선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구요,

 

폴비츠란 학자의 비판이  심리학을 이용한 종교현상만을 비판한 것이라면 동의를 하겠지만,

그런 자아강화의 사도들이 자아심리학자라고 지적한 부분을 보면 잘못된 교회현상뿐만이 아니라

자아심리학자 전반에 대한 비판도 포함된 듯해서(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댓글로나마 저의 견해를 밝힙니다.

 

이 책에서 폴비츠가 단지 자아심리학을 이용한 교회의 처세술을

비판했다면 동감하고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자아심리학이 기독교신앙과 대치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편협된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자아(ego)와 자기(self) 개념은 엄연히  구분되야 합니다.

(목사님꼐서도 자아집중(자기연민, 거짓자아의 강화)을 자기집중이라고 하셔서

  저도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리고 자아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자아 강조를 기독교에서 처세술로 받아들여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짓자아에 함몰되버리는 자아집중 쪽으로 몰고간다면

 그것은 심리학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밖에요...

그런 부작용때문에  자아심리학이론이나 심리학자들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볼 수는 없지요. 

 

예를 들자면

목사님께서 인문학적 성서읽기나 성서비평을 통해 건강한 영성으로 들어가기를 강조하셨는데

다비안들이 인문학적 성서읽기나 신학책들에만 붙들려 머리만 비대해지고 정작, 의도하신

성서의 세계를 관통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인문학적 성서읽기마저가 무조건 도매금으로 매도 당할 수는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바른이성을 톻해서 건강한 영성으로 가듯이

심리학을 통해 건강한 자아세우기도 기독교 영성으로 들어가는 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자아없이 신앙안으로 도피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는 바로는 자아심리학자들 중,

 특히 칼융은 Ego와는 다른 개념의 Self , 즉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도 초월성을 강조했구요.

그것이 심리학 개념속에서지만 이미 우리안의 초월성, 신성을 발견한 것일진데

그런 개념을 잘 이해한다면 기독교 신앙과 자아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대치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과학과 철학이 신학을 이해하는 한 부분이듯이 이미 심리학과 기독교도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는데요.

 

프로이트는 종교현상을 정신병적인 증상으로 이해했지만

그건 이미 심리학자들사이에서도 (칼융이나 다른 대상관계이론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구요,

칼융은 건강한 자아를 넘어서 신성 쪽으로 가는 것을 열어놓았고

기독교 신앙이 이런 심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폴투르니에나 스캇 펙 박사의 고백을 보면 정신분석의사이지만 결론적으로

심리학 이론이나 치료기술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논리적으로 글을 쓸 줄을 몰라서

두서없이 저의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구분되야 하고

진정한 심리학을 이해하면 할수록  바른 신앙의 통로로 이어진다는 것과

다른 학문처럼 신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런 극단적인 병폐나 부작용만을 말하면

심리학이라는 자체가  기독교 신앙과 대치점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실 분이 있으실 것 같아서

노파심에서 잠시 아는 척 하고 나서 봤어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9.17 21:05:35

웃겨 님,

'잠시 아는 척' 하고 나선 게 아니라

심리학에 대해서 전문가시네요.

나는 사실 심리학을 잘 모릅니다.

그냥 개론으로 책 몇 권 읽은 정도라서

폴 비츠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도 힙듭니다.

웃겨 님의 걱정은 폴 비츠에게 해당이 안 될 거에요.

책 제목에 나와있듯이

'신이 된 심리학'이 문제이지 심리학 자체가 문제는 아니거든요.

심리학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를

폴 비츠가 나름으로 설명한 게 위의 책이랍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칼 융의 어떤 부분을 긍정적으로 보고

어떤 부분을 부정적으로 보는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에요.

비츠는 칼 융 학파가 심리학을 종교적 상징으로 발견한 것을 중요하다고 하네요.

반면에 근본적인 문제를 이렇게 정리해요.

"인간의 내면적 삶에 집중함으로써 중교적 무의식이라는 심리적 경험을,

지금도 역사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된 종교적 경험과 맞바궈버리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심리학을 종교로 대체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29쪽)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가 칼 융을 깊이 공부하신

모새골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면서 느낀 것 중이 하나가

성서를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접근할 때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구체적인 내용은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런 걸 구분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심리학적인 자아만족이 기독교적인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거든요.

그걸 구분하는 가장 핵심은

구원의 근원을 자기 내면에서 찾느냐

밖에서 찾느냐라고 보면 됩니다.

폴 비츠가 염려하는 것은

자아심리학이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신성을 찾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 현상 중의 하나가

뉴에이지 운동 같은 거구요.

조금 더 기독교적인 운동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작은 예수가 되자는 주장 같은 거지요.

이런 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상대화되는 겁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에게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

우리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신성을 찾는 게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정통 기독교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답니다.

이런 건 웃겨 님도 다 알고 있을 테니, 긴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읽는 과학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구와 같은 거지요.

문제는 그 도구를 지금 교회가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폴 비츠는 그걸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profile

[레벨:11]아델포스

2010.09.17 15:46:29

심리학의 사도에 '에릭 프롬'이 들어 있어 순간 놀랐습니다.

에릭 프롬은 마르쿠제와 더불어 뉴레프트 운동을 전개한

현대산업사회 비평 주자로 널리 읽혀지고 있었거든요...

 

학창시절 한때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읽고

그 매력에 푹 빠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나'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나타나는 주장들은

사실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는 전혀 다른 긍정들로 이루어졌다 보거든요.

 

뉴레프트 운동을 선도하던 아도르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헤겔의 변증 이론을 한층 전개시킨 부정변증법을 추구하였는데

소외로 대변되는 현대산업사회의 모순을 여지없이 분석하는

실상은 사회비판이론이거든요. 모순의 극복 즉 부정을 위한 긍정이랄까...

 

현대산업사회 속에서의 얄팍한 안락에서

자신의 본질적 또는 고유한 모습을 상실해 가는

당시 현대인들에 대한 커다란 일침이었다고 볼 수 있거든요.

T.S. 엘리엇의 '황무지'와 같은 맥락이기도 하죠.

 

에릭 프롬의 ‘자아 각성’이 문제가 된다면

현대신학과 현대철학이 추구하는

‘본래적인 인간’, ‘고유성의 인간’ 등의 인간 회복이 같은 맥락으로 문제시될 수밖에 없거든요.

 

심지어 예수께서 외치시던

‘회계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셨을 때

회계는 죄의 고백이 아닌 깨어 있음을 명령하심으로 알고 있는데

그 ‘깨어 있음’도 문제 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신이된 심리학’에서 과연 ‘에릭 프롬’ 편을 어떻게 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9.17 21:19:05

아델포스 님,

나도 폴 비츠가 에릭 프롬을 끌고 들어와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프롬의 전체 사상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을 문제 삼는 거라는 점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어떤 부분이지만 그것이 사실은

프롬의 전체 사상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핵심은 이겁니다.

프롬은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에 방점을 둔다는 겁니다.

죄 문제만 해도 그래요.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인간의 본질적으로 악한 게 아니라

문명으로 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연습을 통해서 실천 가능하다고 보구요.

문명 비판적이면서

인간론적 낙관론에 서 있는 에릭 프롬이

폴 비츠에게는 기독교 중심에서 빗겨난 인물로 보이는 거지요.

저도 젊었을 때 프롬에게서 많은 걸 배운 사람이지만

기독교의 중심 신학에서 보면 문제가 없지 않지요.

비츠가 프롬의 종교적 입장을

프롬이 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되리라>에 찾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 책이 있었는지도 나는 몰랐는데요.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되었으면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고

결국 세상의 개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프롬의 생각은

자아심리학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거지요.

프롬의 생각을 그것만으로 다 재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많은 사상들이 서로 얽히고 섥히는 과정에서

건강한 것은 결국 살아남겠지요.

그것이 진리의 힘이기도 하구요.

기독교도 이런 복잡한 사상의 틈바구니에서 

치열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그런 긴장을 놓치면

순식간에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겠지요.

가나안에서 바알과의 혼합주의에

자주 빠져들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좋은 추석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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