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31)

조회 수 1130 추천 수 0 2019.10.11 20:12:26

상투스!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스랍들의 찬송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이런 구절을 교회당에서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을 직접 듣는 거와 같은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이사야의 귀에만 들린 합창 소리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합창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들리는 영적인 합창이다. 시인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작곡가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거와 같다. 오늘 우리도 이사야의 영적인 경험을 이해한다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경험도 기본적으로는 이들의 하나님 경험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거룩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이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을 설명할 때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을 짚었다. 거기서는 주로 두려움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여기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존재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데에 있다. 바르트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절대타자(totaliter aliter). 하나님은 우리와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기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가 그를 규정할 수 없고 범주화할 수 없다. 흔히 말하듯이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초월한다. 제약받는 자와 초월하는 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서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새처럼 공중을 날지 못한다. 사람과 새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놓인 셈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완전히 구별된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종의 불가지론이 개입된다. 이런 문제는 서로의 주장이 얽혀서 따라가기 복잡하니까 길게 끌지 말자. 하나님 인식과 경험에서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주장이 기독교 정통의 입장이다. 그 주도권을 가리켜서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로 우리는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세상 이치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은 진리의 관점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랑의 실증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구별된다는 말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낯설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곧 낯설다.’라는 말이다. 낯설기에 거룩하고, 거룩하기에 낯설다. 이런 점에서 가장 낯선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사야의 환상에 나오는 스랍은 이상한 생물이다. 천사도 이상한 생물이다. 모두 낯선 생물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을 직접 표현할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익숙한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상인 스랍이나 천사처럼 낯선 생물들을 등장시켜서 간접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핵심은 절대적으로 낯선 경험이다. 갑자기 외계인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나님에 대한 낯선 경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종종 나타난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이 되게 하여 히브리 사람들은 건너게 하고, 파라오 마병들은 바닷물에 수장시킨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리암의 노래를 들어보자.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존재다. 그런 일들을 그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다. 예수 사건 앞에서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다 같은 이야기다. 하나님은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낯선 존재라는 말이다.

낯선 존재나 낯선 능력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악한 방식으로 낯선 것들에게는 거룩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사탄이나 마귀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선한 능력과 악한 능력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양쪽 모두 놀랍고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영적인 통찰력의 심화가 최선이다. 영적인 통찰력이 깊어지려면 낯설지만 선한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좋은 시를 많이 읽고 공부한 사람만이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싸구려 시를 구분할 수 있는 거와 같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낯섦을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두지만 낯설다는 경험은 거룩하다는 경험과 같다. 낯선 경험과 거룩하다는 경험의 대상은 어떤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깊이에 들어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스랍들을 경험했지만, 우리는 강과 산과 사막에서도 스랍들을 경험할 수 있다. 나무와 꽃이 스랍이며, 아침 안개와 구름이 스랍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유심히 보면 낯설지 않은 게 없다. 즉 거룩하지 않은 게 없다.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런 걸 잘 살피면서 놀라워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다. 이시영 시인의 시집 사이에서 3행으로 된 시 저 잎새 하나를 읽어보겠다.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강렬한 입김은 스며

바람 불지 않아도 저 잎새 밤새도록 찬란히

은빛 등을 뒤집고 있으니

 

시인에게는 나뭇잎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 그것 자체가 낯설고 거룩해서 신의 입김이 스며들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고유의 단시 하이쿠에 이런 시가 있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간노 다다모토). 사물에 대한 이런 시각 없이 우리는 성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사물의 깊이를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그래서 세상을 새롭고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게 경험하는 신자들은 목사들의 상투적인 설교에서 아무런 영적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한편으로 당연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타깝다.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항목은 졸저 <목사 구원>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21세기 현대인들의 희망은 유물론과 휴머니즘을 토대로 한다. 물질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거듭남이 왜 참된 희망의 근거인가에 관해서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 신앙이 실제 교회 생활과 세상살이에서 현실로 자리를 잡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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