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04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매우 중요한 표현이 여기 나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하나님입니다. ‘장차 오실 이’라고 했으니까, 재림할 예수를 가리키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모두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공룡은 과거에만 해당하고 현재와 미래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는 미래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에게‘만’ 모든 시간이 ‘현재’라고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관념적이어서 어딘가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에 절대적으로 제한받기에 시간을 초월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해두십시오. 현대 물리학은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시간도 피조물입니다. 그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라고 말해도 되고, 말해야 합니다. ‘장차 오실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실체가 미래에 드러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금 까다로운, 또는 모호한 설명이지요?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신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조금 더 어른이 되면 이보다는 쉽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다만 하나님 안에서 제가 영생한다는 사실만은 실제로 믿고 삽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열심히 공부하는 중입니다.
공동번역 [1: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영신께서,]
본문의 말씀과 정목사님이 묵상의 영생을 믿고 산다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작년에 순복음 교호 조용기 목사님과 제가 예전 다니던 감리교 감독님의 별세 후
천국 환송예배 등이 열렸습니다.
조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안되는데, 천국환송예배가 거슬립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니 마치 무속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가는 주님의 자녀인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렇다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까? 그렇다면 왜 일곱 영이라고 하였습니까?
사 11:2가 맞습니까? 다르게 설명된 주석도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