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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0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 말을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그 진술들이 곧 ‘해석’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여러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많습니다. 메시아, 퀴리오스, 다윗의 후손, 재림주, 인자, 외아들 등등, 많은 칭호가 때로는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단독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구원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 당시 전승되던 칭호를 통해서 이 예수님을 해명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마가의 해석은 어떻게 나온 걸까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미 구약성서에도 나옵니다. 약간 간접적인 표현이지만 시편 2:7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할 때 이런 시편이 합창대에 의해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런 진술의 핵심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진술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할까요? 혹시 여성신학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닐까요? 아들이 뭐냐, 딸이라고 하자. 예수님이 생물학적으로 남자이기 때문에 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자. 대충 이렇게 나오면 저로서는 할 말이 궁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진술에서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할 수도 있겠군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성서를 바르게 읽는 게 아닙니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축소하기 위해서 이런 호칭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메시아로 경험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경험에 대한 여러 표현 중에서 하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까요? 그들의 경험이 오늘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나요? 이 질문은 다시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군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는다거나, 단순하게 교리를 외우는 것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 자체에 우리의 영혼을 쏟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삶은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 말을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그 진술들이 곧 ‘해석’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여러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많습니다. 메시아, 퀴리오스, 다윗의 후손, 재림주, 인자, 외아들 등등, 많은 칭호가 때로는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단독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구원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 당시 전승되던 칭호를 통해서 이 예수님을 해명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마가의 해석은 어떻게 나온 걸까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미 구약성서에도 나옵니다. 약간 간접적인 표현이지만 시편 2:7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할 때 이런 시편이 합창대에 의해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런 진술의 핵심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진술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할까요? 혹시 여성신학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닐까요? 아들이 뭐냐, 딸이라고 하자. 예수님이 생물학적으로 남자이기 때문에 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자. 대충 이렇게 나오면 저로서는 할 말이 궁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진술에서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할 수도 있겠군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성서를 바르게 읽는 게 아닙니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축소하기 위해서 이런 호칭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메시아로 경험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경험에 대한 여러 표현 중에서 하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까요? 그들의 경험이 오늘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나요? 이 질문은 다시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군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는다거나, 단순하게 교리를 외우는 것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 자체에 우리의 영혼을 쏟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삶은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길용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임금'에게 부치는 일반화된 호칭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의 기록을 받아든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가복음은 황망하기 이를데없는 책이기도 하겠죠.
마가는 예수가 왕이었다고 선포하고 있고, 그 내용도 첫 구절에서부터 밝히고 있으니까요.
마가가 예수를 왕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뒤이어 11절에 이미 정목사님도 인용하셨듯이
당시 왕들의 즉위식 때 불려지던 정형화된 노래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복음은 왕이신 예수에 대한 실록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제 문제는 "그 왕은 도대체 어떤 스타일의 왕이냐"라는 것이겠죠. 바로 그 점에서 마가복음의 재미는 쏠쏠하게 피어납니다.
마가복음은 요즘 저도 학생들을 위해 풀고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아직 2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기차타러 나가야 겠네요~
그럼~
이 이야기는 마가의 기록을 받아든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가복음은 황망하기 이를데없는 책이기도 하겠죠.
마가는 예수가 왕이었다고 선포하고 있고, 그 내용도 첫 구절에서부터 밝히고 있으니까요.
마가가 예수를 왕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뒤이어 11절에 이미 정목사님도 인용하셨듯이
당시 왕들의 즉위식 때 불려지던 정형화된 노래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복음은 왕이신 예수에 대한 실록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제 문제는 "그 왕은 도대체 어떤 스타일의 왕이냐"라는 것이겠죠. 바로 그 점에서 마가복음의 재미는 쏠쏠하게 피어납니다.
마가복음은 요즘 저도 학생들을 위해 풀고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아직 2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기차타러 나가야 겠네요~
그럼~
"머리끈 동여매고 연필심에 침 바르고.."
ㅎㅎ 표현이 재밌네요.. 국민학교 때 모습이 연상되는 글입니다. ㅋㅋ
10년전 시간여행이면.. 10년이나 뒤진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제라도 알게되어 감사하고, 이제라도 연필심에 침 바르고,
천천히라도 따라갈수 있는 은혜주셔서 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답니다.
"고난조차도 감사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얼마나 커다랗게 제 마음에 와 닿았는지?
아마 목사님은 모르실거예요..
초기 기독교 단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했다는 말씀이 참 새롭네요.
성경이 하나님 말씀자체가 아닌 그들이 경험한 예수,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그들의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거쟎아요..
그동안 그냥 맹목적으로 믿었던 것들을 하나씩 허물 벗기며, 이유와 근거와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신앙의 본질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지난주부터 목사님 글을 읽으며, 본질에 대한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매일 원고지 7,8매 정도 분량으로 마가복음을 묵상하는 글을 쓰는 겁니다.
영적 일기를 쓴다는 심정으로 써볼 생각입니다.
힘들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걸로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16장을 꼼꼼히 살피려면 아마 3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일단 여기 <성구명상> 메뉴에 올렸는데,
앞으로 조금 생각해 보고
적당한 꼭지를 새로 만들어 넣을까 합니다.
이 묵상의 성격을 어떻게 잡는 게 좋을지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큐티는 너무 실용적이고,
바르트의 신학묵상은 너무 사변적이고,
그렇다고 설교는 아니고,
이전에 쓴 성구묵상과 비슷한 성격이 좋겠지만,
조금 더 일상과의 관계를 두텁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작업의 목적은
신학생들과 젊은 목사님들에게
성서 텍스트와 신학을 접목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 공부에 도움을 준다는 것과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지성적인 평신도들에게 신앙의 본질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3년 후쯤에 어떤 결과로 나올지 모르겠지만
관심이 있는 분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덜 심심하겠지요.
야심차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슨 큰 업적을 내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듯한 작품을 낼만한 능력도 없기도 하구요.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