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실제로 말을 전해준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실제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이 입으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아니면 실제로 말하는 건 사람이지만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인가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이사야의 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글입니까? 이 질문을 단순화해 봅시다. 이사야의 글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유대교가 기원후 90년 얌니야 회의에서 구약의 거룩한 문서 중에서 39권을 자신들의 정경으로 결정한 사건에 의해서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경화 이전에는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또한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문서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신약성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준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간혹 설교하는 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오버하는 분들은 자신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실체를 본다는 말인지요. 삶과 죽음까지 포함한 궁극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죽음 이전에 한정되어 있는 인간이 직접 만나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직접 들려준 소리나 글로서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영적인 깊이에서 들여다보고 해석했습니다. 자기 민족이 처한 운명을 창조자이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거실 때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이겠지요. 이사야는 그런 영적인 귀가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바로 그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났으며,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 즉 예언자들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계시의 역사, 구원의 역사이겠지요. 그런 역사의 한 순간에 지금 우리의 삶이 걸려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직접 만났다"고 하는 분들이 여럿 있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비유하자면 법정에서의 변호사)과는 다른 하나님을 직접 만난 증인(witness *물론,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아님)이다"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겠지요.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는 혼란을 느낍니다.
과연 신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입니다. 아래의 귀절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창세기32:24-30] 밤중이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했다고 주장함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니니라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So Jacob called the place Peniel, saying, "It is because I saw God face to face, and yet my life was spared.")
[출애굽기4:24-26] 모세의 아내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듯한 대목
24: 하나님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At a lodging place on the way, the LORD met Moses and was about to kill him.)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But Zipporah took a flint knife, cut off her son's foreskin and touched Moses' feet with it. "Surely you are a bridegroom of blood to me," she said.)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So the LORD let him alone. (At that time she said "bridegroom of blood," referring to circumcision.))
관련성구를 잘 챙기셨군요.
하나님이나 천사 목격담은 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있구요.
사실 성서는 어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일관성을 갖고 저술한 신학책이 아닙니다.
수천년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신앙에 관한 상이한 진술들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서에 없으며,
구원표상도 가지각색입니다.
믿음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고난 자체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결국 성서는 어떤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비교하면 될까요?
성서 텍스트는 모짜르트 악보와 같습니다.
악보가 음악은 아닙니다.
악보는 음악을 지시할 뿐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시할 뿐입니다.
야곱과 모세의 아내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왜 자신들이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명 자체를 만날 수 있을까요?
게놈 지도를 만드는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만나는 걸까요?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현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생명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질문하겠지요.
성서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닙니다.
성서는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에 대한 보도입니다.
하나님은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로 사람과 만나실 수 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간단하게 대답하라고 했는데,
말하다보니, 횡설수설하다보니 길어졌군요.
끝으로,
성서의 텍스트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으로 읽혀야 합니다.
성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서 전체 안에서만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다니는 현실교회는, 이런 주제에 대해 의문을 풀려고 질문을 하거나 또는 의견을 나누고자 토론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없는 불순종하는 자로 몰리거나 대화가 불가능한 험악한 상황으로 변한답니다.
유대인 랍비(Marc Z. Brettler)조차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How to Read the Bibl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October 15, 2005, 384p. )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이 실제로 다윗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까지 하는 때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성서무오류설과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권장됩니다.
바르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것과 교인들과 화합하는 것이 현실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째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주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럴때 일어나는 질문자체를 아주 불경스럽게 여기는듯한 태도를 자주 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멈춘지도 스무살적부터해서 이십년도 더 된 일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물음에 대한 이야기는 않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준비된 말만 되풀이 하는지.. 도무지 모를일 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이란것도 늘 누군가에의해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선길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것 같습니다.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태양빛이 나를 비추듯이 말이죠.
성서를 '해석'과 '신화적 표현'이란 말 안에서
연애편지를 읽듯 말씀을 보니 좋네요.
마치 처음 편지를 받아들고 봉투를 열어가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것까지 다시 점검해보니 아는게 아니였단것을 알게 되네요.
그리고 용어 하나하나부터 개념을 바로 잡아가는게 필요한걸 느낍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를 모두 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니
알게 모르게 앎과 신앙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거 같구요.
길은 아직 멀지만
길을 나선 이상
그 길 위에 있음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것과 교인들과의 화합' 이거 지금 제게도 당면한 문제 입니다.
제가 좀 더 분명해지면 이런 문제들에서도 더욱 자유로워 질것 같기도 하네요.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Q,T 따라가다보면 마음속에많은것들이 일어나는데 영 표현력이부족하여서....이런글 올려도 될까? 잠깐제경험 -___--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차안에서 그즈음 나의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어서 참으로 즐거운시간이였었습니다 어떤사항에대하여 열심히궁금해하고나름 노력도하고 기도로 여쭤보기도한일이 있던중 ...그답이 머리속에 떠오르는건지 누가 말해준건도같고...그런데그것이 하나님에관한어떤것인데 그것이 내가 알게된 것이 하나님에대한 아주작은것 예를들자면 여기 코끼리가있다면 그코끼리꼬리에있는 눈에보이지도않을 작은점정도일것같은데....그순간 그깨달음의 희열이얼마나크던지 가던차를급정거하여..... 왜냐하면 이렇게작은 부분을 알게되었는데 더 아니 하나님의 실체를아니 실체까지는아니더라도.... 알게된다면.... 그순간 그느낌....
떠오르는 성서의 한귀절 아 화로다 나는망하게되었구나! 그귀절이 실감이났습니다>>>>> 생략
이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정리가 됩니다.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근거가 정경으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계시를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하시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소리나 글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구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거심을 어떻게 알아먹느냐..하면,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자기민족이 처한 운명)을..
창조자이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영적인 깊이로 들여다보고 해석한다는 거죠..
이제 이해가 됩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딤후3:16 말씀을..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
귀에 쏙쏙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런데 목사님!
또 궁금증이 제 안에서 발광을 하는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요
그리고 이를 근거로 목사님께서도 줄기차게 주장해 오셨구요.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도 없고 그렇기에 음성도 들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게 참 궁금하네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성서의 주장도
유대인들의 이런 신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도 같구요.
다른 고대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이 단지 자신들의 신, 야훼를 인간과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그런식으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내부에 존재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인간이
그런 신의식에 근거하여 갖는 공연한 공포심인지 궁금하군요.
성경에 보면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더군요.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데 그것도 안되니 미치겠고요.
어떤 사람이 성전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급살맞아 죽는가하면
짐을 싣고 가던 수레가 삐꺽해서 짐짝이 쏟아질 것 같으면
마땅히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상식인데
법궤를 운반하던 도중에 자격없는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댔다가
현장에서 급살맞아 죽은 성서의 사건 같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아주 인간적인 추측을 해 본다면)
실제로는 심장마비인 것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인가요?
이런 사건이 세계관이 미숙한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질수 있다하더라도
비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데
신앙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이 사업하다가 망하거나
교통사고 나서 죽을 뻔 한 경험들을 자신의 신앙적 결함과 연관해서 해석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구요.
어쨌든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서야 조금씩 눈이 열리는 것 같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결코 육신적인 소경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들어 깨닫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