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2)

조회 수 1342 추천 수 0 2019.09.04 21:39:42

벧전 1:1절에 열거된 지명은 주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속한다. 그곳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흩어진 이들은 디아스포라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기독교인의 삶을 기본적으로 나그네라고 규정한다. 흔한 표현이기는 하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도 있다. 나그네 개념을 전문 용어로 바꾸면 구도자다. 구도자는 도()를 찾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 나라를 찾는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여기에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사람이다. 돌아서는 삶을 회심(메타노이아)이라고 한다. 한 번의 회심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기독교인은 길을 가는 태도로 살아간다. 구도자들은 이런 구도를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도적 삶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걸음은 멈춤이 없다. 이는 곧 우리의 삶에 완성이 없다는 뜻이다. 푯대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뒤에 있는 것은 버린다.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장난감에 관심이 가지 않는 것과 같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사들이 수행 과정에서 행하던 전통의 하나는 순례다.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가 가장 유명하다. 순례는 나그네로 사는 삶을 몸으로 훈련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체력에 맞도록 200를 가거나 500, 또는 그 이상을 갈 수 있다. 순례 과정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걷는다. 무상무념에 떨어질 수도 있고, 주변의 경치에 몰두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순례 행위도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볼 수 있는 삼보일배나 오체투지가 그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순례 중에 일상의 일을 모두 잊는다는 점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향해서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그 사이에 숨 쉬고, 일용할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배설하고 잔다. 인간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동을 한다. 자식과 사업 등을 걱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삶이 산티아고 순례와 같은 나그네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쉽지 않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묶여서 산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다. 높은 수준의 신앙에 들어간 사람은 현재 놓인 상황과는 별개로 좀 더 가볍게,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만, 낮은 수준의 신앙에 머문 사람은 반복해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한 단계만이라도 위로 오르기 원한다면 이런 과정을 이미 겪은 스승을 만나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 기자들이 우리에게 스승이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그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멘토다. 이번 베드로전서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으면 한다.

본문은 나그네인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2절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지금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번역은 은혜롭게 들리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공동번역이 낫다.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 번역 성경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인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서 선택되어서, 성령을 통하여,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시고 피를 뿌리심으로써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장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 아니면 나그네에게 연결되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루터 성경과 KJV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게 맞다. 교리적으로 볼 때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순종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라는 공동번역은 오역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흔히 들었던 이야기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믿는 사람이 될지 아닐지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개인의 책임은 면제된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은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예정론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기계적인 예정론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실종된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은 신앙의 신비를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기는 하다. 친구를 따라서 왔든지, 모태 신앙인이든지, 스스로 선택했든지 어떤 경우라도 다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일이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본문은 이를 미리 아심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무조건 화려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한 지경에 떨어질 수도 있다. 벧전의 수신자들은 특히 어려웠다. 그들은 박해를 일상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학자들에 따라서 네로 황제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라고도 한다. 두 황제 모두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미 하나님이 아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아셨다는 말은 자신들의 삶이 내면적으로 볼 때 최고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신앙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영성에 달려 있다.

인사말의 마지막 문장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이다. 은혜와 평화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에서 은혜와 평화를 찾으려고 한다. 가장 세속적인 방식은 돈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6:24)는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들었지만, 대다수 사람은 어중간하게 걸쳐서 살아간다. 한편으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의 삶을 돈이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고히 지배하는 21세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점에서 옛날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투쟁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만이 은혜와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한다. 붙든 사람은 고단한 세상살이에서도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벧전 기자는 인사말을 끝내고 5장에 걸쳐서 기독교인다운 삶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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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9.09.06 02:00:37

(교정입니다. ^^;;)

두 번쨰문단 셋째 줄a "그냥 걷을 뿐이다."-------- 그냥 을 뿐이다.

[레벨:23]브니엘남

2019.09.29 09:42:09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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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16)

  • 2019-09-24
  • 조회 수 1230

성령과 복음 베드로전서 기자는 복음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중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깊이 연구하고 기대했던 내용이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읽는 초기 기독교인들에 전해진 복음이다. 12절에서는 천사들도 보기 원했던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존재인데, 그들도 복음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영혼 구원은 천기누설처럼 하나님에 의해서만 준비되고 실행된 사건이니 ‘계시’로만 알려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본문은 복음 전파를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성령을 ...

베드로전서 강해(15)

  • 2019-09-23
  • 조회 수 952

예수의 고난과 영광 11절이 말하는 고난과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훨씬 이전에 살았던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알았다기보다는 그들의 메시아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게 옳다. 여기서 영광은 부활이면서 동시에 승천이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또는 생명의 절정이기에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표현이 이를 가리킨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주간일지 9월22일

  • 201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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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9월22일, 창조절 4주 1) 불의의 재물- 오늘 설교 본문에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물론 진리가 늘 상식적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상식을 파괴하지도 않습니다. 불의라는 단어는 세속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세속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위 표현은 “세속적인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재물과 더불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재물을 영원한 생명을 ...

베드로전서 강해(14)

  • 2019-09-21
  • 조회 수 831

선지자들의 전통 이 구원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말한 것이다. ‘선지자들’은 좁은 의미에서 후기 선지자들, 즉 3명의 대(大)선지자와 12 소(小)선지자들을 가리키지만 크게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참고로 구약성경의 구조를 간략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모세오경-창, 출, 레, 민, 신/ 전기 선지서(이스라엘의 실제 역사)-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하까지/ 후기 선지서- 대선지서와 12소 선지서인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성문서- 나머지 성경. 후기 선지자들을 문서 선지자들이라고도 한다.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강해(13)

  • 2019-09-20
  • 조회 수 851

영적인 삶 ‘영혼 구원’은 오늘의 삶을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영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혼 구원이 없다. 영적인 삶이 무엇이냐가 영혼 구원에서 핵심이다. 이미 앞에서 영육 이원론의 관점은 기독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영적인 삶은 영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성령 충만이다. 성령과 영은 같은 의미이다.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 프뉴마다. 이 고대 언어는 영이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되고 바람이나 숨이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된다. 고대인...

베드로전서 강해(0) [2]

  •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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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를 읽는다! -순례자 영성과 기독교 신앙- 이번 사경회의 주제는 “베드로전서를 읽는다!”(부제: 순례자 영성과 기독교 신앙)이다. 베드로전서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 년 전에 초창기 기독교의 문서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인류의 문명의 긴 역사, 더 나아가서 45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짧지만, 개별 인간의 인생에 비하여 아득한 세월이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전서는 그런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신앙의 원천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베드로전...

베드로전서 강해(12)

  •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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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원을 영육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곤란하다. 육체는 늙고 썩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영혼 불멸설이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장례식 설교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인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고린도교회 신자 중의 일부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 15:12)라고 주장했다. 영혼 불멸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부활은 없다. 죽지 않았으니 부활도 없는 셈이다...

베드로전서 강해(11)

  • 2019-09-17
  • 조회 수 1164

영혼 구원 앞에서 하나님의 칭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이기에 인간 언어로는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마 24, 25장이 이를 비유로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칭찬을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영혼 구원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절). 믿음의 목표가 영원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냥 구원이라고 해도 좋은데 여기서는 굳이 ‘영혼 구원’이라고 표현했다. 큰 차이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본래 영혼 구...

주간일지 9월15일 file

  •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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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9월15일, 창조절 3주 1) 괴수- 죄인의 괴수라는 바울의 표현이(딤전 1:15) 아주 과격합니다. 이런 정도의 통찰력이 있으면 겁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 말은 이미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좋으니 사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다른 이들이 아니라 저에게 은혜로웠습니다. 2) 출석률- 제가 보기에 우리 교회 신자들의 주일예배 출석률은 높은 편입니다. 대다수 교인이 아...

베드로전서 강해(10) [3]

  • 201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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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기쁨 베드로 사도는 가장 기초적인 기독교 신앙을 설명한 뒤에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6절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라는 접속 부사가 이를 의미한다. 독자들은 지금 시련을 겪는 중이다.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6b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한다. 8b절에도 이를 반복했다. 기쁨은 신앙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기쁜 일들을 찾는다. 집을 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출세하는 일들이 기쁨의 이유다. 문제는 그 모든 기쁨의 이유가 될만한 일들은 두 가지 속성으로 인해서 참된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나는 기...

베드로전서 강해(9)

  • 2019-09-13
  • 조회 수 837

하나님의 보호하심 살아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의 두 번째 이유는 5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라는 데에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하시는가? 비행기나 배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만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간혹 그런 선정적이고 극적인 이야기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말은 어려움에 대처할 능력을 하나님이 믿는 이들에게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귀...

베드로전서 강해(8)

  •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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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유업 살아있는 희망의 구체적인 내용이 4절과 5절에 각각 나온다. 4절은 유업이고, 5절은 보호하심이다. 먼저 유업을 보자. 공동번역은 유업을 분깃이라 표현했고, 루터 성경은 유산(Erbe)이라고 표현했다. 물려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유업의 속성을 셋으로 표현한다. 1) 썩지 않는다. 2) 더럽지 않다. 3) 쇠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것에 나타나는 속성과 반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썩고 더럽고 쇠한다. 이 세 속성 중에 썩는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

베드로전서 강해(7)

  • 2019-09-11
  • 조회 수 1132

1)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완성되겠지만 지금 여기에 선취의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도로 설명하면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님’(not yet)이면서 동시에 ‘이미’(already)의 변증법적 관계로 우리에게 임한다. 예를 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정의(justice)를 보자.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노력했다. 투쟁하고 참았다. 옛날보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워진 건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다.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때 완전한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아...

베드로전서 강해(6)

  • 2019-09-10
  • 조회 수 1141

예수의 부활이 거듭남의 근거인 이유는 무엇인가? ‘거듭나게 하신다.’라는 표현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은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표현이다. 전자는 중생(重生, regeneration)으로, 후자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 불린다. 벧전 1:23절에도 ‘너희가 거듭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거듭남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약성경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온다. 요 3:1절 이하를 따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에 예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예수는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

주간일지 9월8일 file [5]

  • 2019-09-09
  • 조회 수 2165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9월8일, 창조절 2주 1)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이사야와 에스겔과 더불어서 대(大) 선지자로 불립니다.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전승된 말씀의 양이 다른 소(小) 선지자들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입니다. 무려 52장입니다. 이사야는 66장, 에스겔은 48장입니다. 다른 소 선지자들의 글은 대개 10장 내외입니다. 예레미야의 생애는 불운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한 탄식이 넘쳐나는 <애가>가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전승되...

베드로전서 강해(5)

  • 2019-09-07
  • 조회 수 1012

거듭남과 산 희망 본문에는 찬송의 내용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살아있는 희망을 알게 하셨다. 신약성경과 사도신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말할 때는 늘 ‘죽은 자 가운데서’를 붙인다. 부활은 당연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니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문구는 필요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 ‘죽은 자 가운데서’는 초기 기독교에서 벌어진 이단 논쟁의 결과물이다. 당시 기독교에서 가장 큰 이단은 영지주의 계통의 가현설(doceism)이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신성을 극대화하고...

베드로전서 강해(4)

  • 2019-09-06
  • 조회 수 1070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찬송은 일종의 제사 행위다. 제사는 절대자에게 자신을 바치는 의식이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런 종교의식에 참여한다. 주일 공동예배가 그것이다.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 두 가지 영적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경험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그에게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절대자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그...

베드로전서 강해(3) [2]

  • 2019-09-05
  • 조회 수 1510

1장 3-12 하나님 찬송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배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

베드로전서 강해(2) [2]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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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1절에 열거된 지명은 주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속한다. 그곳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흩어진 이들은 디아스포라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기독교인의 삶을 기본적으로 나그네라고 규정한다. 흔한 표현이기는 하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도 있다. 나그네 개념을 전문 용어로 바꾸면 구도자다. 구도자는 도(道)를 찾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 나라를 찾는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여기에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사람이다. 돌아서는 삶을 회심(메타...

베드로전서 강해(1) [2]

  • 2019-09-03
  • 조회 수 2650

베드로전서 강해 1장 1-2 <디아스포라 나그네>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이하 벧전)는 1세기 후반 10년 어간에 기록되었다. 요한복음의 시기와 비슷하다. 베드로는 이미 64년에 로마에서 순교 당했기에 벧전은 베드로의 저술이라고 볼 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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