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50)

조회 수 898 추천 수 0 2019.11.07 20:59:45

아멘

 

송영은 아멘신앙을 근본으로 한다.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거나 동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아멘만 필요하고 아멘만 가능하다. 난민 가족을 상상해보라. 한 살 된 아이는 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 생명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안다.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아버지의 행동에 아멘이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가슴에 안겨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멀리 떠난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멀리서 군인들이 쫓아오는 걸 눈치치고 적군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안 계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멘한다. 이런 영적인 내공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졸저 <주기도란 무엇인가>(홍성사)에서 한 대목(189)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아멘만 아는 사람들이오. 하나님 앞에서는 아멘 외에는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아무것도 없소. 이것은 의 신앙이오. 하나님 앞에서는 예만 있을 뿐이지 아니오는 없소. 이를 공자 왈로 듣지 마시오. 습관적으로 예를 하라는 말이 아니오. 예수님의 비유를 보시오.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형은 예만 했지 실제로는 가지 않았소. 이것은 예가 아니오. 마음이 없는데 입만 연 것이오. 예에는 당연히 아니오도 포함되어 있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예 하려면 사람의 요구에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하오. 우리가 늘 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을 전폭적으로 지배하면 우리는 아니오를 말할 기회가 없소. 이것을 가리켜 큰 긍정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소. 긍정이라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오.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 유의 신앙을 가리키는 게 아니오. 그가 말하는 긍정은 심리적인 자기 암시에 불과하오.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나르시시즘과 비슷하오. 큰 긍정은 자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또한 자기를 확장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 구원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오.

 

오늘날 세상살이에 쫓기는데도 아멘 신앙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이냐, 또는 그런 신앙은 땅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열광주의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아니다. 아멘 신앙은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능력에 대한 큰 긍정이지 현실을 나 몰라라 하는 패배주의나 몰()역사주의가 아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비루한지도 잘 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현실과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8:28) 흔들림 없이 믿는다. 일종의 바알숭배인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멘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물질 숭배의 허상을 뚫어보고 성경과 2천 년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영적인 내공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설교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방인들의 삶을 추종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끊임없이 영적인 촉수를 맞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기독교라는 외피를 쓰고 실제로는 일종의 기복주의에 떨어져 있는 셈이다. 6:31-33절 말씀은 이렇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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