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구원(83)
십일조 헌금이 율법적이면서 동시에 기복적이라고 하더라도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는 필요한 제도가 아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되었던 면죄부도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죽어 연옥에서 고된 단련을 받는 부모의 영혼을 위하여 교황청에서 발행한 면죄부를 사면 그 돈이 헌금함에 ‘찰랑’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부모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 말을 완전하게 믿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헌금이 가톨릭교회를 위해서 사용...
교회 구원(82)
예수께서는 십일조에 관해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였기에 당연하다. 넓은 의미에서 헌금에 관한 말씀이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얽힌 이야기에 나온다. 막 12:43절은 이렇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헌금이 자칫 영적인 교만과 위선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고다. 헌금을 정말 사심 없이 드리기는 쉽지 않다. 장로가 되려고 목돈 헌금을 꼬박꼬박 내는 이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
교회 구원(81)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헌금은 십일조다. 십일조를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도 제법 된다. 교회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이 거의 불문율로 자리를 잡았다. 십일조 헌금을 내지 않는 신자는 교회의 중직을 맡기 어렵다. 구약 말라기 3장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장이 과격하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둑질하는 자는 당연히 저주받아야 한다. 거꾸로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에게는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교회 구원(80)
교회 구원을 주제로 하는 이 글의 성격에 비춰서 헌금 문제는 조금 더 짚는 게 좋겠다. 자본주의 체제에 길든 우리에게 헌금 문제는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헌금 종류가 너무 많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서 월정헌금, 주일헌금, 각종 감사헌금, 장학 헌금, 건축 헌금 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어떤 교회에서는 아무런 신학적 근거나 성경적 근거도 빈약한 ‘일천번제’ 헌금도 한다. 왜 이래야 하는지를 아는 이해할 수 없다. 세계 여러 나라의 헌금 상황이 어떤지는 정확하게 모르니까 ...
교회 구원(79)
전도 문제보다 헌금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전도 문제도 결국에는 헌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옛날에 어디선가 들었거나 읽은 이야기다. 한 미션 스쿨의 이사장은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이 모두 돈이야 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걸 들은 사람이 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한 발언이기는 하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은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느는 것이 아니라 헌금 액수가 는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에는 헌금을 내게 하려는 방법론이 꾸준하게 개발되었다. 사이비 이단들은 교주의 영적 ...
교회 구원(78)
한국교회가 유난히 전도와 헌금을 강조하는 이유도 사실은 각자도생의 압박감에서 온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전도와 헌금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지난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본받을만한 전도와 헌금 행위는 많았다. 지금도 그런 행위는 필요하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지금 나는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병적 증상으로서의 전도와 헌금을 말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일종의 이벤트처럼 여긴다. ‘총동원’ 주일 행사를 한다. 전도 왕을 뽑아서 시상한다. 그리...
교회 구원(77)
본질에서 바알 숭배와 다를 게 없는 교회 성장론에 매몰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공공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자기 교회의 몸집을 키우는 일에만 마음이 있으니 이웃 교회를 어떻게 살피겠는가. 마치 경쟁 관계에 있는 유명 브랜드 치킨집이 상대 치킨집을 보살피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한국교회의 이런 성격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개별 교회는 자기 살길을 알아서 찾아야 한다. 교회 개척 성공담이 미담으로 나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목사는 선망의 대상이다. 2천년대에 들어와...
교회 구원(76)
한국교회가 대부분 겉으로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기에 그 안에서 일하는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기업의 이익 증대만을 목표로 하는 기업 CEO 마인드로 목회에 임한다. 본인이 직접 창립했거나 청빙을 받았거나를 불문하고 오로지 교회 성장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기업을 키우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이 세상 기업 CEO들을 지배하듯이 목회자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립하지 못하는 소규모의 시골 교회를 자원하는 목사가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다. 목회 자리가 없어서 잠시 그런 ...
교회 구원(75)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소유 욕망이 무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단적인 예로 부동산 투기가 파멸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재산 증식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토대라는 인식과 경험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똑같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다. 대형 교회 50개를 추리면 반이 한국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도 한국에 있다. 한 교단에 있는 교회인데도 A라는 교회에는 수천...
교회 구원(74)
이런 성경 구절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늘 경험한다고 말이다. 교우들이 서로 보살피고 존경하면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 말이다. 칭찬받을 만하다.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따뜻하고 단단한 소속감을 교회에서 느낄 수만 있어도 건강한 교회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기능을 말할 때 예배, 교육, 봉사와 겸해서 친교(코이노니아)까지 포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꾸로 교우들이 전혀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도 적지는 않다. 같은 교회 교우들끼리, 목사와 일반 신자들...
교회 구원(73)
엡 4:4-6절은 이렇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모든 교회는 본질에서 하나다.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은 모두 한 하나님을 믿는다.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도 하나이고, 구원도 하나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세례도 하나이고, 성찬식도 하나다. A라는 교회에서 받은 세례와 B라는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
교회 구원(72)
교회의 공공성 사도신경에 따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전통적으로 “공교회를 믿는다.”(Credo … Ecclesiam catholicam.) 여기서 ‘카톨릭’이라는 단어는 로마가톨릭 교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주교나 감독이 관리하는 교구를 가리킨다. 한 장소에 건물과 조직을 구성한 개별 교회만이 아니라 그 개별 교회가 전체를 이루는 교구가 곧 교회라는 뜻이다. 즉 교회는 사적인 게 아니라 공적이고 개별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이라고 말이다. 영어 사도신경은 이를 Universal로 쓴다. ‘공교회’ 개념을 한국교회 실정에 맞춰서 설명하면 노회(지방회...
교회 구원(71)
하나님의 이름 우리는 지금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라는 사도신경의 한 문장을 따라가는 중이다. 교회의 구원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데에 있으며, 교회의 교회다움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바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라는 문장에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자체가 거룩한 건 아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거룩하지 않은 행태는 자주 나타났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결속될 때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고 느...
교회 구원(70)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심연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극히 낮춘다. 당연히 낮출 수밖에 없다. 현재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마저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오체투지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심연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 12:1-8절에는 예수 앞에 엎드려 그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는 마리아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들고 온 향유는 고가품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부모가 마련해준 게 아니겠는가. 가룟 유다는 그녀를 나무...
교회 구원(69)
한국교회의 일반 그리스도인이 성소수자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적 행위가 죄이기에 그런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확신이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데에 있다. 이를 영혼 구원에 대한 유별난 열정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나님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서 착한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는 이중적 구원 표상에 묶인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표어를 가슴에 새긴다. 칼뱅의 이중 예정에 대한 오해가 이런 표상을 불러왔다. 눅 16:19-31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
교회 구원(68)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게 되었다는 신앙이 있다. 우리를 대신하셨다 하여 이를 대속론이라고도 한다. 이게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논리이다. 여기 살인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고, 무기 징역 선고를 받을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다.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우리가 벌을 받는 게 논리적으로 옳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외아들을 보내셨고 죄 없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
교회 구원(67)
신앙의 형식과 내용 성경은 시인의 영혼으로 읽어야 그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 내용과 기독교 교리는 사실 언어가 아니라 주로 메타포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거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났다.”라는 표현이 그런 것들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메타포와 상징과 비유가 가리키는 실질적인 내용을 모르기에, 즉 시를 시로 읽을 줄 모르기에 많은 교회 지도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성경을 읽고 독단적인 구원론을 설파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영혼의 만족을 얻...
교회 구원(66) [1]
대표적으로 시인들은 이런 존재의 빛과 그 신비를 일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문단에 등단한 전문 시인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시인의 시각과 감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앞의 두 연만 보자.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시인의 영혼에서 국화꽃과 소쩍새의 울음이, 그리고 국화꽃과 천둥소리가 신비롭게 연결되었다. 물리학적으로는...
교회 구원(65)
서양철학만이 아니라 동양철학도 존재의 신비를 화두로 삼는다. 노자의 도덕경 첫 문장이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부르면 본래의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이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도덕경이 말하는 이 도를 말장난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도 있다. 실체로 존재하는 색의 세계가 곧 비어있는 공이고, 비어있는 공의 세계가 곧 실체인 색이라고 말이다. 봄이 되면 나무에서 잎이 나오고,...
교회 구원(64)
왜 유는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하는 질문은 다음을 가리킨다. 나무는 존재하고, 내가 사는 마을에 종종 나타나는 고라니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나무와 고라니 중간쯤 되는 어떤 것은 없다. 그것은 무(無)다. 바위는 존재하고 강물도 존재하는데, 바위와 강물 중간쯤 되는 어떤 것은 없다. 왜 없는가? 없으니까 없다고 말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인간 존재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존재하게 되었으니 특별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인간과 비슷한 어떤 동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