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문

조회 수 6957 추천 수 0 2019.12.31 17:00:29

대구 인권위, 에큐메니컬 주관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와 인권상 시상식설교

20191230일 오후 6:00, 대한성공회 서대구교회 애은성당

 

제목: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6:20-26)

 

누가복음 기자는 마태복음의 팔복”(5:1-12)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가난과 복의 관계를(6:20-26) 전한다.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보다는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훨씬 강력한 표현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오늘 본문만은 눈에 들어오지 않은 척 외면한다. 이 본문이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에 관해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는 비겁하다. 이 말씀이 옳다면 부자 교회는 화를 당하고 가난한 교회는 복이 임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것이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용감하게 전할 수 있을까? 이 말씀에 근거가 있을까?

21세기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가난한 사람은 죄인이고,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구제의 대상은 되지만 행복의 주체는 되지 못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대개는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을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믿는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살펴서 전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실천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영성의 문제다.

우선 실천 문제다. 가난한 자는 물질로 인해서 인간의 품위를 잃는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다.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저항하고 연대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최소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공급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이미 절대 빈곤을 벗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인간의 품위를 회복할 수 있는 물적인 토대가 갖춰졌다. 문제는 일종의 막장 유사 종교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에 묶여 있다는 데에 있다. 자본주의는 구약 선지자들이 줄곧 경계했던 바알숭배와 동일한 개념이다. 대한민국교회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는다고 말만 하지 자본주의라는 귀신 앞에서 꼼짝 못 하고 있다. 예수의 축귀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우리가 저항하고 연대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지 않겠으나 그 길이 최선이니 믿고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런 삶의 태도야말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영성 문제다. 이게 사실은 더 중요하다. 가난 영성이 갖춰져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구도정진의 태도로 저항하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외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이다. 거꾸로 부자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기에 화가 미칠 것이다. 기댈 곳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자신이 기대던 대상과 더불어서 허무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한국의 부자 교회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보이니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 안다. 하나님 이름으로 세속적인 욕망을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기독교인은 세례 받은 이방인으로 산다.”라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기독교인이나 실제 삶에는 세속 이념에 떨어진 이방인이다.

하나님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가난하기에 오히려 삶(생명)을 풍성하게 누린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돈이 많아야만 누릴 수 있는 삶과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삶을 살펴보자. 돈이 많아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은 큰 집, 해외여행, 돈을 보고 모여드는 친구들, 호텔 뷔페 등등이다.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삶은 하늘을 나는 새 바라보기, 자유롭게 걷기, 어린아이 웃음소리에 귀 기울이기, 성경 읽기, 외로운 사람의 친구 되어주기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실은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삶이 실제로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가난 영성을 말하는 당신은 실제로 지금 가난한 자가 되고 싶냐, 하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영성이 부족하여 자발적인 가난을 택하지는 못한다. 가난하여 불편한 것들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라는 귀신에서 놓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하게 될까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해도, 아니 그런 순간이 와야만 눈에 보이는 삶이 전개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부자로 사는 사람이나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언젠가는 모두 가난한 자가 된다. 모든 소유가 박탈당하는 죽음의 순간이 바로 그때다. 그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오면 부자들에게는 화가 임할 것이다. 아니 이미 화가 임했다. 부의 운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그 순간을 이미 경험했으므로 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복이 임했다.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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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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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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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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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6 updat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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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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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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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1 [2]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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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7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1절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묘사됩니다. 앞에서 저는 ‘어린 양의 아내’라는 표현을 근거로 본문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 나오는 묘사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이 이 대목에서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재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혹은 종말 이후의 세...

계 21:10

  • 2024-03-29
  • 조회 수 102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6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겔 40:2에서도 에스겔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상한 성읍 형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높은 산은 영적인 경험이 일어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모리...

계 21:9 [2]

  •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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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5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9절부터 ‘새 예루살렘’이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에 관해서는 이미 16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여기 21:9절에서 다시 그 일곱 천사 중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심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안내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표현이 재미있...

계 21:8 [2]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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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4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은 마지막 심판을 여기서 다시 언급합니다. 온갖 불한당이라는 불한당은 다 열거되었습니다. 그들은 불 못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여기서 열거된 불한당 같은 모습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

계 21:7 [2]

  •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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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3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바로 앞 대목인 3-6절에 언급된 새로운 세상을 상속받을 사람은 ‘이기는 자’입니다. 이긴다고 해서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쓴다거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듯이 남과의 경쟁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세상이 말하는 승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은 악을 악으로 갚는 방식으로라도 싸워서 이기라고 강요하고 유혹하지만, 성경은 선으로 악을 ...

계 21:6 [2]

  • 2024-03-25
  • 조회 수 130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2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나는 알파와 요메가요.’라는 문장을 신약 원전 그리스어로 써보겠습니다. ἐγὼ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에고는 ‘나’라는 뜻이고 큰 꺾쇠괄호가 달린 ‘에이미’는 영어 be 동사와 같고, ‘토’는 정관사 the이고, 알파는 그리스어 알파벳 첫 글자이고 이니셜로 표기된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꺾쇠괄호가 달린 이유는 사본에 따라서 생략되었기 때문으로 보입...

계 21:5 [2]

  • 2024-03-22
  • 조회 수 165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1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장엄한 문장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하나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만물은 140억 년 전 빅뱅 이후 지금까지 전개된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철학과 물리학의 대상도 이 만물입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만물의 본질을 물, 불, 공기, 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것으로 만물의 실체가 다 드...

계 21:4 [2]

  • 2024-03-21
  • 조회 수 186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0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4절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합니다. 눈물에는 기쁨의 눈물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슬픔의 눈물이겠지요. 슬픈 일을 당해도 눈물을 씻겨주는 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말씀이 관념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들리시는지요. 이미 계 7:17절에서도 이 문제는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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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0
  • 조회 수 187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59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요한은 큰 음성을 다시 듣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둘 만한 중요한 표현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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