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해 질 때

조회 수 3997 추천 수 22 2006.06.16 23:13:52
2006년 6월16일 해 질 때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2)

시몬의 장모는 이제 온전한 정신을 차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는지는 볼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겠지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가 “저물어 해 질 때”라고 합니다. 야간 조명이 거의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해가 진다는 건 낮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접어야 할 때입니다. 낮과 밤의 경계인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에게는 일거리가 많아진 셈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해 질 때”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낮의 역동성과 밤의 평화와 달리 이 저녁은 저에게 신비롭게 다가왔습니다. 가정환경이 좋지 못했던 까닭이겠지만 집보다는 밖으로 쏘다니던 일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저에게 해가 꼴깍 넘어간 직후 짙어지는 노을과 침침한 색깔로 바뀌는 사위(四圍)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천호동은 농촌과 거의 다를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논, 밭, 들판, 숲, 개천, 과수원과 함께 살았습니다. 혼자서 들과 숲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가 온 세계가 붉게 변하는 장면 앞에서 충격을 받곤 했습니다. 이런 충격은 숲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한창 정신없이 뛰어놀던 동네 마당과 집들이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어릴 때의 경험이 어렴풋한 ‘존재’의 경험이었겠지요. 무엇이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느낌은 제 의식 깊은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우주 물리학적으로 해가 진다는 말은 그렇게 옳은 건 아닙니다. 해는 지는 게 아닙니다. 해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고, 대신 지구가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고대인들에게 해가 지고 다시 뜬 현상은 신비로움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고대 종교가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다른 종교처럼 태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야훼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그리스도교 역시 태양 빛을 중요한 신앙적 메타포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일을 지킨다거나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전통,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요한의 해명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리학적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보라는 것도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거의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고대인들에게 비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학적 정보의 우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정보가 우리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신비 경험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미숙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인간 언어를 뛰어넘는 ‘거룩’의 영역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삶은 점점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거룩은 주술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입니다.
저는 고대인들의 삶과 우리의 어린 시절이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는 건 많지 않아도 근본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제 어린 시절의 ‘세계’는 마치 요정들이 노는 숲속 같았습니다. 세상을 아는 지식은 없었지만 세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린 시절 제게 충격적이었던 “저물어 해 질 때”가 그립습니다. 굳이 해 질 때만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그런 환희와 놀라움으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은총이 넘치시기를...

주님, 존재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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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seyoh

2006.06.17 23:52:24

정목사님의 '저물어 해질 때에' 에 관한 한줄 묵상을 읽으니 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던 부분이 생각납니다.
그부분을 잠시 옮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세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리고 약한 자와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본문도 그 중의 하나, 치유사역을 하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가 유독 제눈을 끄는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첫부분 “저물어 해질 때에”란 부분입니다. 마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종이도 귀하고 그럴 때인데 글자 한 자라도 줄일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되풀이 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해가 진 후”라던가 “그날 밤에” 라고 기록하면 될 터인데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 성경의 기록은 말 한마디가 다 그 뜻이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분히 검토해보기로 했습니다.

개역한글에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번역을 해 놓았고 아가페 쉬운성경을 찾아 보았더니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라고 내가 맨처음 먹었던 생각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찾아 보았습니다.
“해질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0) )
”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6)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해질 적에, 해가 질때, 저물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마태 복음에 비해서 마가는 유달리 ‘ 해가 진 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가는 해가 진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 ? 해가, 해가 지자… 해 ..혹시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 무언가 해와 관련되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소설식으로 말하면 복선이 깔린 단어이다. 무언가 있다 .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래서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1절에 와서 제 눈이 다시 한번 멈췄습니다

“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
안식일이라 .. 이 말에 여러분 일단 마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 특히 신약에서- 안식일이란 시간이 나타나면 그 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이 ‘해가 진 후에’ 라는 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 그래서 우선 그 안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 21-22) 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고 ( 23- 28)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 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셨습니다.( 29-31)

그렇게 21절로부터 31절까지가 그날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 32절도 역시 같은 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인가?
저물어 해질 때에 …. 그렇지 같은 날, 그러니 안식일이지 라고 생각하다가 … 이게 유대인의 날짜이니 …우리나라식으로 계산으로 하면 안되지 ..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식의 계산으로는 분명 같은 날인데 그런데 유대식으로 보면 이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 계산으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은 해가 진 후 하루가 시작되어서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그날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해가 져도 그날, 같은 날인데 비하여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해가 지면 이제 다음 날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종합해서 32절을 읽어보니 32절의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은 그 날, 안식일이 지나고 … 안식일의 해가 떨어지자 마자 … 이런 말이 되겠고 그렇게 안식일이 지나니 병들고 귀신들린 백성들이 모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지 못하니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 지니 비로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석이 되니까 그제서야 마가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한 그 행간에는 어서 안식일이 지나 갔으면 하는 그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적어 놓아 그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해가 지자 비로소 모여 들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 해가 쨍쨍 비칠 때 와서 고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잡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나오지 못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 후 비로소 나올 수 밖에 없는 그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가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는 말 속에 담은 것입니다. (이하 생략)>

[레벨:8]김인범

2006.06.17 08:16:53

아,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요. 그 간단한 표현 속에서 그런 깊은 의미를 살려 내시는군요.
정 목사님의 어릴적 기억과 함께 느끼는 그 표현의 의미도
오 목사님의 분석적 연구로 찾아내는 그 표현 속에 담긴 의미도
성경을 접하면 느끼게 되는 또다른 묘미인 것 같고
우리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과 은혜로우심의 또 한 부분을 맛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에 주인공들이 우리인데 깨닫지 못하면 안식일에 종들로서 사는
그 안타까움을 지적하므로 우리를 깨우치시는 저자의 의도도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그러나 분명 풍성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또다른 한 장면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 황홀해지는 저녁,
끝이 아니라 뭔가 상상이 않되는 시작을 보는 것 같은 그 광경을
다시한번 떠 올려, 요즘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왠지 모를 안락함을 새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굴뚝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흰 연기들과 함께
서서히 그러나 진하게 풍기는 밥짓는 냄새가 그 저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군요.
'저물어 해 질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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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6.17 23:33:55

오세용 목사님,
성서를 통시적으로 읽고 계시는군요.
좋은 착상인 것 같습니다.
그 주제에 접근해 들어가는 과정도 좋구요.

김인범 목사님,
굴뚝과 연기, 밥짓는 냄새,
멋진 묘사군요.
그런 한 순간이 영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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