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205) 9:35

네가 인자를 믿느냐.

 

9:8-34에는 예수의 어록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의 긴 어록 중심으로 전개되는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는 대목이다. 눈이 밝아진 이 사람과 이런 일이 일어난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과 이 사람의 부모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당시에 예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어땠는지를 암시하는 두 구절이 눈에 띈다. 하나는 22절이다. 바리새인들의 닦달을 받은 부모가 아들에게 대답을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다른 하나는 마지막 34절이다. 눈이 밝아진 사람과의 논쟁 끝에 할 말이 궁색해진 바리새인들의 결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기원후 70년 유대 전쟁이 끝나고 예수 공동체가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가 아니겠는가.

예수는 눈이 밝아진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서 나눈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진다. 예수의 첫 질문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질문도 역시 요한복음 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배경에 두고 읽어야 한다. 예수 공동체가 해체될 수도 있는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강한 믿음이다. 예수의 이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예수는 다른 경우에도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했다. 예수가 누군지, 예수를 믿는지, 등등의 질문이다. 이런 질문의 핵심은 예수를 실제로 인자로 믿는지를 대답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대답이 분명해야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 문명에 치우쳐서 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가 말하는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둔 사람처럼 살기에 신앙은 삶의 부분적인 외피로만 남는다. 멋을 내기 위해서 모자를 쓴다거나 가슴에 꽃이나 특별한 문양의 장식물을 다는 정도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처럼 눈이 밝아진 경험이 없으면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앙과 삶의 위기다. 겉으로는 그게 위기로 다가오지 않을 테니, 사는 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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