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299)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앞 구절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을 예수가 말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한 대목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죽어서 저 하늘나라 어딘가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희망없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다. 일리가 있다. 나도 그런 내세 신앙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내세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을 알고 믿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 어딘가에 우리가 죽어서 갈 공간은 없다. 아버지의 집, 또는 하늘나라는 공간적으로 저 위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상으로 지금 이 세상의 깊이에 있다.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 그 미래의 하늘나라는 이미 여기에 비밀스럽게 와 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의 보도를 따르면 스데반은 순교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선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행 7:55). 그가 영원한 시간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스데반처럼 이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실질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요 14:3절에서 예수는 거처에 대한 진술을 이어간다. 거처를 예비하겠으며, 거처가 준비되면 제자들을 “나 있는 곳”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나 있는 곳”은 생명 있는 곳이다.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있는 곳 말이다. 예수가 말하는 “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찾는 과정이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 여정이다. “나 있는 곳”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가 감옥에 머물든지 단칸방에 머물든지 “내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로 인해서 지금 여기 세상에서 거처할 곳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가. 문제는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를 좇느라 예수가 말하는 “나 있는 곳”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 세상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