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363)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위로의 영이자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에 관계되는 주제는 죄, 의에 이어서 세 번째로 심판이다. 심판도 앞의 두 주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들이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말은 그것이 구원에 관한 서술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는 예수가 종말에 재림하여 행하게 될 마지막 심판이다. 보통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이 심판을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두려워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다. 마지막 심판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나 그렇게만 보는 건 반쪽만 아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기쁨의 대상이다. 그 순간에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봐도 이 말이 옳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두렵다.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삶은 더 두렵다. 죽음은 삶을 파괴하는 우리의 모든 욕망과 시행착오도 끝내는 사건이기에 우리가 참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하다.

위 구절에서 세상 임금이 심판받았다는 말은 예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지적이다. 죄 없는 이를 죽인 행위는 분명히 죄다.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는 로마 제국을 대표한다. 로마 제국은 예수를 반역자로 심판했으나 그 심판으로 자신들이 심판받는 것이다. 그 징표가 바로 예수 부활이다.

오늘도 로마 제국의 속성은 그대로 이어진다. 정치의 속성이 본래 그렇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 아닌가. 이 대목에 인간 역사의 딜레마가 놓여 있다. 야망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기 힘들고, 지도자가 된 사람은 자신의 야망을 확장하려고 끝없는 악을 행한다. 다른 건 접어두고, 위대한 건축물만 해도 그렇다. 그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땀과 피를 흘려야만 했다. 관광지가 되어 후손들의 밥벌이 수단이 되었을지 모르니 언젠가는 그 위대한 건축물도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 묵시적 미래를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증언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나는 이 진술이 물리학의 차원에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더불어서 우리 몸이 무너지듯이 모든 위대한 건축물도 없어진다. 때가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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