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186
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여기서 요한은 정말 이상한 현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시체에 들어가니까 시체가 일어섰다는 겁니다. 살아났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생기(生氣)는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단어 πνεῦμα ζωῆς의 번역입니다. 프뉴마는 영이고, 조에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영’(spirit of life)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어쨌든지 이 구절은 에스겔 37장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들이 생기(생명의 영)를 얻어서 살아나는 묵시적 환상을 보았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부활 개념에 대한 가장 원시적인 생각입니다. 본래 구약성경에는 부활 개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같은 후기 묵시 사상에서 부활 개념의 실마리가 제시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믿기 힘들다고 여기시나요? 일단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 전체는 예수 부활을 전제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전 15:14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 저는 예수 부활을 믿고, 따라서 저의 부활도 믿습니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라서 저는 그분에게 의존하여 부활의 열매를 이어서 맺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의 리얼리티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의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개별 인간에게도 물리학이 말하는 불가역의 원리가 해당하기에 한 번 지나가면 다시 그 몸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나’는 일회적인 존재입니다. 두 번 다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지금의 ‘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변화된 몸이 곧 부활입니다. 그걸 영생이라고도 말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고 질문하는 분도 있겠지요. 어머니 자궁 속의 태아가 자궁 밖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미래가 없는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창조주를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언젠가 그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전통이 에스겔을 통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공동번역 [11:11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새번역 [11: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생명의 기운이라고 알기 쉽게 쓰여 졌네요.
지난 6월경 강원도인제군 대암산의 용늪에서 산너머에서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대암산 용늪에서는 언제나 신선한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산과 바다의 거센바람 등을 맞이했지만, 대암산 용늪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저에게 깊은 추억을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멍하니 바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상황이 되면 또 가고 싶네요.
용늪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벌써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