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402)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두 번째 예수 현현은 요 20:19-23절에 나온다. 첫 번째 현현은 마리아라는 개인에게 일어났지만 여기서는 제자 집단에서 일어났다. 안식 후 첫날 저녁은 오늘 계산으로 주일 저녁 시간이다. 한 군데에 모인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갔다.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가 예수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예수는 문이 잠겼는데도 그곳에 나타나셨다. 죽기 이전의 실질적인 몸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는 평소처럼 평화 인사를 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을 발음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에이레네 휘민!” 의례적인 인사말이다. 근동 사람들은 이런 인사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좀처럼 평화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들은 자신들이 평화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자기들을 중심에 놓은 평화를 말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으로 평화를 강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팍스 크리스티)를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기독교를 확장하는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평화이며,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평화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제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이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기독교의 책임이 없지는 않으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정치가들이 기독교를 이용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참된 평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될 수 없다.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포식자들이 서로 공격하지 않고 생존할 수 없는 거와 같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평화마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실제로 알고 믿는다면 생존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에 당연히 평화로운 삶을 추구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경쟁력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평화의 인사를 자주 나누는 연습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대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레벨:23]브니엘남

2020.08.22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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