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일 새 포도주 (4)

조회 수 2342 추천 수 13 2006.10.01 23:23:25
2006년 10월1일 새 포도주 (4)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2)

어제 저는 포도주의 알코올 농도가 13.5%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잔만 마셔도 취기가 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막걸리나 동동주가 되겠지만, 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취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기보다는 뇌의 이성적인 활동이 둔화된다고 보아야합니다. 그 덕분에 평소에 걱정하던 문제들도 걱정거리로 느껴지지 않는 거죠. 그러니 기분이 좋다고 느낄 밖에요.
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새 포도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대교는 낡은 가죽 부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담아낼 수 없었던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새 포도주를 마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취한 사람들입니다.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거죠. 성령 충만이라는 것도 역시 영에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취하는 것은 술에 취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보입니다. 일단 평소에 걱정하던 것들이 작게 느껴집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 기쁨,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돈을 잘 쓰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인색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술 취하면 난폭해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잘못 믿으면 난폭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술이 그 사람의 판단력을 파괴하듯이 신앙이 우리의 판단력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술 취하면 무조건 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못 믿으면 자기 연민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학과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잘 취합시다.

[레벨:4]New York

2006.10.02 09:03:48

여기서 왜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일을 해야하는 “저주”를 받아야했는지를 밝혀 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정도 “발견”의 부분을 밝히지 않고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것 같습니다. 즉, 발견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왜 “일”을 하지않고서는 안되겠끔 했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덧부쳐 말씀드리면 선악과를 초월한다는 것이 무슨 도사가 하늘을 날라다니고 홍해가 갈라지는등의 우리의 일상이나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닌 우리 일상에, 역사에 이미 그 답이 다 존재한다는 것; 예수님은 이미 그 답을 다 나타내셨다는 것; 다만 우리 각기가 “나 자신”에 가려서 이를 볼 수 없는 것뿐; 그 볼 수 없음의 역사가 지난 역사라는 것; “그 식’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역사는 되풀이 하여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역사에서 그 많은 고통을 허용하고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 식”으로는 절대 안됨을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끔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예에서 그 식이 아니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경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일을 가능하면 하기 싫어합니다. 그 싫어하는 데도 일을 우리가 해야되는 것에 은폐된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장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완전의존(Dependence)으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그러한 자식을 키우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독립(Independence)할 수 있게끔 많은 사랑과 애를 쓰십니다. 거의 다 이 수준에서 끝납니다; 거의 다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새끼가 독립만 할 수 있다면…” 즉, 독립보다 더 성숙한 그 다음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호의존(Interdependence)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True independence is possible only through interdependence; 진정한 독립은 상호의존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끔 하신 것은 “상호의존”의 필요성을 우리로 하여금 결코 완전히 잊지 않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인간을 일이라는 것을 통해 상호의존의 필요성을 잊지 않게 함입니다. 엄청나게 크나 큰 사랑이십니다. 적어도 우리는 일이라는 이름아래서는 서로 상호의존하는 명분과 “핑계”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이 힘든 것은 자신에 가려 사는 우리 각기가 상호의존이 힘들기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에서는 상호의존을 합니다. “일이니깐.” 상호의존하는 것은 정말 “일”입니다. 정말 가능하다면 일하기 싫습니다: 소위 말하는 “더러워서 일 못해 먹겠다.”라는 “그래도 일이니 할 수 없지”라는 “일상”에는 어마어마한 진리가 “은폐”되어 있습니다. “더러워서 일을 못해 먹겠다”함은 “내가 얼마나 잘 낫는데, 내가 적어도 저런 인간들의 수준은 아닌데”하는 자신이 우선 올라옵니다. 자신만 보고 은폐된 진리는 놓칩니다.

우리의 현 주소를 봅시다. 우리 각기는 상호의존이 아닌 “돈과 프라이버시”를 통해 그 독립을 성취하려고 경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돈과 프라이버시”를 이미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상호의존의 필요성을 느낄 기회가 차원적으로 적은 상태를 가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사회기준으로 승자와 패자를 모두 포용해야하는가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아니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은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일을 할 기회만이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상호의존의 기회를 겸허히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호의존없이 소외된 독립을 얻자면 “돈과 프라이버시”만 있으면 됩니까?

상호의존을 해야만이 사람은 바뀝니다. 그렇지않으면 하나님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그냥 도덕적 발언으로만 들립니다: 사고로도 실상 그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상호의존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호의존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성숙해질 수 없고 더 자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제가 정목사님이 이재철 목사님의 이해를 구하여 같이 하시라는 것은 정목사님이 이재철 목사님과 상호의존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때에 새 포도주를 담을 새 가죽 부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상호의존으로 서로 새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이 이재철 목사님과 상호의존하는 것은 “일”이라 가능하면 하기 싫습니다: 일이니깐. 이재철 목사님은 그 목사님대로 교회를 이끌어 가시면서 교회일이라는 이름아래 서로 교회가족끼리 상호의존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가 있습니다. 정목사님도 대구에서 교회를 이끄시면서 이 다비아를 이끄시면서 교회일이라는 이름아래 서로 상호의존을 함에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가 있습니다. 정목사님이나 이재철 목사님 정도 되시면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가끔은 혹독하게 비평하시고 한탄하시는 “기존의 구조”에서 일을 하는 테두리를 넘어 상호의존이 시도되고 실행되어야합니다. 제가 지금 그 명분을 제시하고 상호의존할 “핑계거리”를 제공하니 얼마나 더 수월합니까? 제가 경험으로 아는 데, 세상에서 주어진 일의 범위 밖이나 “교회,” “학교, 자식일” 등등의 기존 “전통” 일의 레벨이 없이 자신이 직접 “상호의존”하려고 하면 정말 불가능할 정도로 힘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일을 하지않으면 안되게끔 하시여 상호의존을 필요성을 완전히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정목사님이나 이재철 목사님이 “성공”하신 만큼 서로 상호의존하기 힘들다는 생각은 드실 것입니다. 그 반면에 그러하기에 상호의존하면 기존의 차원을 넘어서 그만큼 새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호의존하시면 그 자라남을 분명히 다른 차원에서 느끼실 것입니다. 잘 난 사람끼리 서로 상호의존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잘 난 사람이니까요. “잘 난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서로 의존하자고 그러지?”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구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일을 해야되는 구조입니다. 다른 교회를 이끄시는 분들이, 각기 그래도 잘 나가시는 분들끼리 상호의존하는 것은 정말 “일”입니다. 그래서 해야합니다. 정말 일이니까요. 정말 상호의존을 통해 차원이 다른 자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영어 선생을 중간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은 안 됩니다.”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같은 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 갈 것입니다. 다만 때가 되어 제가 영어로 쓴 발견을 나눌 시에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하자는 얘기였습니다. 이는 다음에 부연설명하겠습니다.

여태까지의 “답” 속에 더 큰 답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서로 상호의존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정말 “일”입니다. 그런데 은폐되어 있는 큰 답은 더 이상 상호의존하는 것이 “일”이 아닐 때가 바로 우리가 “일”의 저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를 “우리”보고 준비하시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였고 뜻입니다. 더 이상 상호의존하는 것이 일이 아닌 그 때와 그 곳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일도 아닐 때까지 열심히 우리는 일을 해야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가 합시다.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닙니다. 계속 미룬 것이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아닙니까? “일”을 미루어서는 절대 안될 수 밖에 없는, 그래서는 계속 말도 안되는 고통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 큰 가르침을 준 것이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아닙니까? 상호의존이 일이 아닐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상호의존이 일이 아닐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 자신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안됩니다. 그 자체가 답이라고 할 정도로 혼자서는 안됩니다.

목사님,
일이니깐 가능하면 하기 싫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해야합니다. 제가 먼저 여쭈지 않았습니까? 제가 상호의존을 하자고 여쭈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되어 자식을 가지면 상호의존합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색다른 기쁨이고 영광스러운지 알지 않습니까? 자식과 상호의존으로 새로운 자신이 만들어지는 기쁨을 축복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식과 상호의존도 제대로 하자면 힘듭니다. 일입니다. 모든 이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상호의존을 하기 전까지는 자식과의 상호의존도 온전히 안됩니다. 매일 같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상호의존을 해보세요. 그리고 바뀌고 자라는 우리를 경험합시다. 그 곳이 바로 주님의 품입니다. 상호의존이라고 하는 것은 막연한 도덕적 발언이 아닙니다. 제가 쓴 텍스트에서 물리학의 경우를 직접 나누자면, 양자역학에서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깨고 들어가보니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상호연결되어있는 “괴이한”현상이 관찰되어 진 것입니다. 여러분 과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발달해왔습니까?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이가 바로 과학의 방법이고 방법이 목적이 되는 세상에서는 과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그것이 날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부터 바꾸었지요: 신물리학이라고. 상호연결을 통한 상호의존의 비밀을 물리학자가 깨달으면, 즉 성경에 은폐된 비밀을 보면 물리학도 차원이 다르게 발달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과학의 이기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모든 예, 신경제, 예술, 진화론, 사회 자연과학에서 다 밝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썼습니다. 그리고 나누려합니다. 그런데 새 가죽부대를 완성시켜야합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상호의존하여 서로 새롭게 자라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저에게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 밝힘을 혼자할 수도 없고 혼자해서는 아니됨을 여기서 저는 밝혔습니다. 이 시대에는 누군가에는 밝히실 이 일이 왜 저한테 왔는가를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이유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일 때에 저는 영어와 한국어라는 아주 다른 언어로 어느 정도 문학 가치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습득하는 재주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한국어와 일어가 비슷하고, 중국어가 차라리 영어에 가깝습니다: 이는 일어와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지고 영어로 쓰는 주류작가는 아직까지 없어도 중국어의 모국 출신인 영문작가는 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되듯이 황단하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각 공부를, 각 텍스트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해가 되는 기존 편견없이 그 공부들을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기회들을 가진 것입니다. 저는 모태신앙도 아니고 기독교 집안과는 거리가 먼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면서 영어로 우선 동양철학을 공부했습니다. 한글로 공부했다면 기존에 해가 되는 뭐 도를 깨달아 도사가 날라다니고 그러한 편견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불교에서 드는, 도저히 현실적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도덕경, 노자를 통해 풀었습니다. 그 다음에서야 성경이라는 아주 쉽지만 어려운 책이 읽히기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의 편견에서 자유로이 읽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초월”이나 “역사”같은 큰 단어들을 편견없이 대할 수 있어 이해에 도달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학문을 학부때부터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학교장이 밀어줄 정도인 큰 운도 따랐습니다. 저는 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대학에서 학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목사님도 독일에서 독일어라는 새로운 언어로 신학을 공부하시면서 분명히 새로운 언어로 읽기에 더 명확히 보이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극대화되어 경험하면 어떤 엄청난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리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실까해서 이 개인적인 경로를 나누어봅니다.

왜 하필이면 목사님과 이재철 목사님이냐고요? Allow me to speak boldly. 답을 가진 제가 보았을 때에 기가막힐 정도로 질문들을 정확히 하십니다. 그리고 “저의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분들입니다. 지금 이 글을 목사님은 물론 다비아 식구들도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이재철목사님과 나누고 같이 상호의존하여 “일”을 해나가는 데에 서로 밀어줍시다. 지금 해야할 일입니다. 미룰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영어문제를 해결할 분이 생각났습니다. LA의 사랑의 교회에 담임목사로 불과 몇 년전에 취임하신 “김승우” 목사님이 계신 것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났습니다. 글은 모르겠지만 말은 영어와 한국어로 자유자재로 하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혹 다비아에서 연락이 가능하신 분이 계신지? 서울의 사랑의 교회를 통해서는 분명히 연락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여기서 언급할만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지금 여기” 모든 곳에 계십니다. 도사가 하늘을 날라다니는 초월자체가 주제인 만화영화가 아닙니다.

상호의존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부연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상호의존이 더 이상 일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seek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먹을 것인지, 입을 것인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다는 것을 앞에 물리학의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나타내었습니다.

벌써 저는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을” 나누는 것이 저한테는 발가벗는 것과 같은 데 여기서는 “예수님에 취해서 쓰니” 신기할 정도로 훨씬 더 쉽습니다.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서 “제 교회”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기도해주십시요 so that I'd have strength to carry on.

[레벨:1]똑소리

2006.10.02 06:17:13

촌철살인......
똑소리 나는 표현이었습니다.

정 목사님!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한가위 보내시길 빌겠습니다.

[레벨:1]한성영

2006.10.02 15:45:39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공부나 하셔............... TO N,Y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02 23:58:06

한성영 님,
위의 방식으로 대글을 다는 건 보기에 좋지 않군요.
뉴욕 님의 글 중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든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는 게 낫겠지요.
나는 지금 뉴욕 님이 무엇을 어떻게 경험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직 나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아서 뜸을 들이고 있는 중이죠.
그리고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서 글을 정독하지 못하는 게 아쉽죠.

[레벨:0]서우정

2006.10.03 22:17:09

뉴욕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호기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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