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인자 (2)

조회 수 2604 추천 수 26 2006.08.12 23:31:50
2006년 8월12일 인자 (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 2:10)

‘인자’는 신구약성서에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인자로 언급되고, 다니엘서에서 묵시상적 메시아가 인자로 언급됩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중간 시대에 유대인들은 인자 용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당하는 순간에 본 환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가 곧 인자라고 진술했습니다.(행 7:55,56) 결국 새로운 세상(에온)에서 모든 영광을 확보하고 세상을 심판할 분으로 인식된 묵시적 ‘인자’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예수와 동일시된 셈입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에서 사용된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신앙이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는 기본적으로 메시아사상과 연결됩니다. 인간을 구원할 어떤 이가 오신다는 이 메시아사상은 다른 종교에서도 약간의 흔적이 있긴 하겠지만 신구약성서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을까요? 이 말은 곧 오늘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재림을 왜 기다리는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삶의 형식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심에 놓인 대답입니다. 이런 생각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고대인들이 오랫동안 경험한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위대한 정치인들이나 장군들이 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 사회가 완전해지지 못합니다. 그런 지도자들은 민중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민중을 도구화합니다. 비교적 민주적인 지도자가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최고의 복지사회를 구현한 북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질적인 면에서 참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정신적인 스승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 스포츠와 온갖 종류의 엔터테인먼트처럼 정신적인 스승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고상해질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은 모두 일시적일 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삶의 조건에서도 우리는 때로 변비로 고생하고 복통이나 두통으로 고생하거나 소외감을 느끼듯이 현재 이 땅에서 작동하는 사람이나 제도나 형태로는 참된 구원이 요원합니다. 결국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구원이 밖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환상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게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런 묵시사상 문서를 읽으면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건 만화가 아닙니다. 이건 현실을 꿰뚫어본 예언자의 희망이며 비전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을 의미했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가 아니면 이 세상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며 처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묵시적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희망은 현재의 세상을 개량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이걸 사실로 믿느냐구요? 믿습니다. 다만 성서가 말하는 구름을 오늘의 물리적 구름으로 믿는 건 아닙니다. 오늘의 생명 현실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그 인자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마라나타!

주님, 언제 오시나요?

[레벨:1]Aslan

2006.08.13 00:58:01

아멘.
그 인자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 그렇게 믿습니다.

[레벨:7]늘오늘

2006.08.13 02:02:39

운명이 우리의 손에서 결정되지 않는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기다리는 이 땅에서의 삶,
그 한 인생.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전혀 무능하다면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로부터,
무능함이 주는 역설적인 자유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면 충분한 것일까요?

고통 뿐 아니라, 재미도 있는 세상이니,
하나님의 일을 고민하기보다는,
피조물의 고락을 노래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인자의 오심이, 들풀을 입히심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건일까 싶기도 하고요.
그 의미의 특별함이 인간 구원 때문이라면,
이토록 특별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은 전혀 무능한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13 23:25:14

늘오늘 님,
우리는 성서 텍스트 한 곳에서 한 가지 사실만 읽어야 합니다.
인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 땅의 삶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천국의 시민권을 말하고,
이 세상의 일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그런 텍스트에서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적 책임은 어쩌란 말이냐, 하는 질문은 의미 없는 거죠.
위의 제 글은 한 가지 궁극적인 것만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완성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이고,
오늘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칭의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 외부에서(extra nos) 주어진다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칭의만 강조하면 어떻하냐,
성화도 필요하지 않냐, 하는 말은 다른 자리에서 언급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은 무지하게 중요합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칭의와 영화, 영생은
곧 오늘 우리가 현재의 삶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는 칭의로만 강조되어야 하고,
재림은 재림으로만 강조되어야 합니다.
한 자리에 모든 걸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중심을 잘 잡고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겠지요.

[레벨:7]늘오늘

2006.08.14 02:18:07

제가 알아들었는지 궁금하시죠?
넷! 감사합니다!!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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