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6일- 내가 원하노니

조회 수 3266 추천 수 22 2006.07.06 23:24:05
2006년 7월6일 내가 원하노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말고 누가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메시아 성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일치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곧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것을 믿는가, 아닌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합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을 그대로 행하셨다고 말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원하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병든 자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원하신 분이십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행하시지 않고,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만을 원하면서 사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겠지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며 삽니까?
이런 질문 앞에서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가 모두 마더 테레사처럼 자신의 삶을 완전히 희생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테레사처럼 살아간다면 농사는 누가 지으며, 공장은 누가 돌립니까? 우리는 공부도 해야 하고, 가르치기도 해야 하고, 장사도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일에 충실하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한에는 예수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나병환자를 고치러 다니거나 오지 선교사로 떠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라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감당해야 할 몫은 제 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그것에 의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일상에 매몰되면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 무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일상이 구별되면서 하나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살아가는 게 일단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일상을 넘어서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상에 침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일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아무런 이해타산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능력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낼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걸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만 관심을 두었지 자기 자신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교회가 과연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기 교회의 이름을 널리 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게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의지, 우리의 노력을 완전히 무화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지 않을까요?

주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며 사는 겁니까?

[레벨:8]김인범

2006.07.07 11:04:53

전에 이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 묵상하면서 나름으로 깨달았던 내용이 기억되는데
에수님의 연민에서도 언급했지만 주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모습을
당신의 비하와 동일시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시' 는 이유가 바로 그들과 같이 되셨고 그들과 한 몸이 되셨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안타까움과 절망을 몸소 체험하시면서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만의 고통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고통이 되어 '내가 원하시는'거죠.
그렇게 생각하다가 멈춘 것이, 너무나 감정적이고 우리로 볼 때 불가능한 현실로 생각되어
더 이상은 진전하지를 못했었는데 오늘 아침에 목사님의 말씀을보면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같아 생각을 이어 몇자 올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바울과 야고보가 환란과 인내, 연단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거죠.
사실 이성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보면서 연민을 가질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원한다'는 주님의 마음까지 가는 길임에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에는 이유없는 고통을 맛보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 그 가족들의 생활 방식은 분명 오늘 여기와는 다르겠죠.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래서 교회를 유기체로 상징했겠죠.
한 몸으로, 그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내와 네가 아니라 우리로 한 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동일시가 가능할 것 같군요.
그리고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이 몸소 보이셨던 그것이란 생각입니다.
신앙의 진수가 주님이 나병 환자와 동일시 되었던 것처럼
동시에 나병환자 같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는 그 놀라움과 영광
그래서 세례가 더욱 의미를 지니는 것이고
그 주님으로만 나의 모든 것을 삼고 그 주님으로만 내 삶의 양식을 삼는
성만찬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발전하다보니 왠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
부끄러움에 지우려다가 그래도...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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