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7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는 종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4절)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걸 문학적으로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출 33:23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살아있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직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를 직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 밖을 보려면 그는 우물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요한이 묵시적 환상으로 경험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면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없고 밤도 없다고 했듯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 범주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계가 실제로 어떤지를 우리는 지금 실증적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실제로 죽어보지 않으면 피상적으로만 알듯이 최후의 심판이 끝난 다음의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세계가 왔을 때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세계를 메타포와 상징으로만 말할 뿐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아무리 확인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도 물론 메타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하나님이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로고스가 육신을 입은 존재라는 요한복음의 가르침도 이에 해당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보았고 그렇게 믿었으며 그걸 온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에 생명의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고 예배 때마다 고백했습니다. 그런 고백이 지금까지 우리 그리스도교에 전통으로 내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