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0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내가 속히 온다.’라는 문장에서 주어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추정되기는 하나 문맥으로만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지금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에게서 말을 듣고 그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이런 문맥에서만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 관점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락에서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요한이 문장을 정확하게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실 것이다.’라고 써야 합니다. 요한은 글쓰기의 문법적인 정확성보다는 메시지 자체에 관심이 있기에 듣는 사람이 알아서 들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요.
‘내가 속히 온다.’라는 7절 문장은 12절과 20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재림 신앙이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사도신경에도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의 재림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기다려야 할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이미 재림은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 재림에 관한 이야기가 살전 4:13-18절에 나옵니다. 16-7절만 읽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걸 문자로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단순히 상징이라는 말일까요?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메타포와 상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메타포와 상징이 사실은 아니나 사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말하는 궁극적인 현실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속히 온다는 문장에 한정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속히’라는 부사로 번역된 그리스어 ταχύ는 영어 quickly에 해당합니다. 루터 번역 성경이 사용한 독일어 bald도 똑같은 뜻입니다. 이런 부사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어떤 때는 1년이 길지만 어떤 때는 10년도 ‘곧’에 해당합니다. 제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는데,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겁니다. 지구 나이가 45억 년입니다. 이런 시간도 더 긴 시간에 비하면 ‘속히’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늘 숫자로 시간을 계산하기에 너무 빠르다거나 너무 느리다고 생각합니다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시간은 숫자의 범주를 초월합니다. 숫자로서 긴 시간도 없고 짧은 시간도 없습니다. 종말에 일어날 새 하늘과 새 땅,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경험될 것입니다. 138억 년 전에 발생한 빅뱅 창조가 종말과 동시적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종말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죽음의 순간이 오면 한평생이 정말 한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듯이 말입니다.
두루마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βιβλίον입니다. 비블리온은 책이라는 뜻 외에 ‘두루마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영어 단어 Bible이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두루마리는 양피지로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두루마리의 내용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μακάριος)라고 했습니다. 마카리오스는 마 5장에 나오는 ‘팔복’에서 반복된 단어인 그리스어 Μακάριοι의 단수형입니다. 요한이 마태복음을 알고 있었을까요?
헬라어 'taxu' 는 '타쿠'로 발음 되는지요? 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