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1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글을 쓴 이가 요한이라는 사실은 여기 계 22:8절만이 아니라 계 1:1, 2, 4절 등등에도 나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요즘도 영어 이름으로 ‘존’이 흔하듯이, 당시에도 흔해서 실제로 그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만 분명합니다. 그는 ‘보고 들은 자’라고 했습니다. 보고 듣는 행위는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시원적이고 원초적인 깨달음이 바로 보고 들음에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을 보거나 누에가 뽕나무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영혼의 눈이 열리고 영혼의 귀가 열린 사람은 존재의 신비를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눈과 귀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영혼의 눈과 귀가 예민한 사람들이라서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들은 것처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 앞에는 천사가 있습니다. 천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읽다가 불현듯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을 친구나 가족에게 설명해도 그들은 별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깨달음은 천사 경험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니까요. 그런 천사 경험을 일상에서 친숙하게 이어가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의 눈과 영혼의 귀가 얼마나 밝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이런 눈과 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평소에 신앙 공부를 통해서 그런 차원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고, 잘못하면 오히려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묵시적 상상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일종의 오체투지(五體投地)입니다. 오체투지가 우리 인간의 가장 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땅바닥으로 낮출 때만 세상의 만물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잘난 척하고 고개를 높이면 현실은 멀어지겠지요. 더 근본에서 보면 인간은 언젠가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살아있는 동안 오체투지를 연습하는 게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