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3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은 두루마리를 ‘인봉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인봉이라는 단어는 계 5:1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있는 두루마리가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인봉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열지 못합니다. 어린 양만이 그 인봉된 두루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2:10절에서 언급된 두루마리는 인봉되면 안 됩니다. 이유는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καιρὸς(time)입니다. 카이로스는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은 그리스어 크로노스(χρόνος)입니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표기될 수 있지만, 카이로스는 영혼으로 경험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사람에게 4월16일은 일 년 365일 중의 하루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들에게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날입니다. 앞사람에게는 4월16일이 크로노스로서의 때이지만 뒷사람에게는 카이로스로서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당연히 늘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카이로스는 은혜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이며, 종말 완성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은 이미 7절에 나왔고, 이어서 12절에도 나옵니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임박한 재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만 짚겠습니다. 예수 재림이 지금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바로 재림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연대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의미 충만한 시간인 카이로스이기에 1억 년 후에 발생해도 지금 여기서 발생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억 년 후에 벌어질 그 사건이 선취의 방식으로 이미 오늘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과 인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역사도 실증적인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인 미래의 힘에 지배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들릴 겁니다. 다시 일상의 예를 들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커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이전에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상대방을 만나게 하려고 일어난 것으로 경험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사실, 또는 그 사건이 과거의 일들을 벌어지게 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을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공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관점을 종말론적 사유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래 지향적 종말의 능력으로서 오늘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그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