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2:10

조회 수 234 추천 수 0 2024.05.07 20:19:04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3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은 두루마리를 인봉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인봉이라는 단어는 계 5:1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있는 두루마리가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인봉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열지 못합니다. 어린 양만이 그 인봉된 두루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2:10절에서 언급된 두루마리는 인봉되면 안 됩니다. 이유는 때가 가까이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καιρς(time)입니다. 카이로스는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은 그리스어 크로노스(χρόνος)입니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표기될 수 있지만, 카이로스는 영혼으로 경험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사람에게 416일은 일 년 365일 중의 하루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들에게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날입니다. 앞사람에게는 416일이 크로노스로서의 때이지만 뒷사람에게는 카이로스로서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당연히 늘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카이로스는 은혜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이며, 종말 완성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은 이미 7절에 나왔고, 이어서 12절에도 나옵니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임박한 재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만 짚겠습니다. 예수 재림이 지금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바로 재림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연대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의미 충만한 시간인 카이로스이기에 1억 년 후에 발생해도 지금 여기서 발생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억 년 후에 벌어질 그 사건이 선취의 방식으로 이미 오늘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과 인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역사도 실증적인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인 미래의 힘에 지배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들릴 겁니다. 다시 일상의 예를 들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커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이전에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상대방을 만나게 하려고 일어난 것으로 경험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사실, 또는 그 사건이 과거의 일들을 벌어지게 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을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공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관점을 종말론적 사유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래 지향적 종말의 능력으로서 오늘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그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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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6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은 같은 의미를 세 가지 변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미 계 1:8, 17, 그리고 2:8과 21:6절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왔습니다. ‘시작’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ἀρχὴ(아르케)입니다. 아르케는 요 1:1절에도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태초는 한자이고 시작은 순수 우리말입니다. 요한복음을 번역한 사람과 요한계시록을 번역한 사람이 달라서 번역의 일관성이 떨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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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5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속히 오실 그분께서 내리실 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상을 받을 자는 로마의 박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인간의 업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세속적인 가치만을 추구한 사람의 영혼은 세속적인 가치로 채워질 것이며, 거룩한 힘을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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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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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4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어린 양이신 재림주 예수께서 ‘속히 오실 것’이며 ‘때가 가까웠기에’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꿀 여유가 더는 없습니다.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럽게 살게 하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대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런 명령은 어딘가 이상하게 들립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오히려 불의한 자는 더 시급하...

계 22:10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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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3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은 두루마리를 ‘인봉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인봉이라는 단어는 계 5:1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있는 두루마리가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인봉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열지 못합니다. 어린 양만이 그 인봉된 두루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2:10절에서 언급된 두루마리는 인봉되면 안 됩니다. 이유는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계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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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2 22: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천사는 요한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천사 자신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경배받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할 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신출귀몰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지성이나 도덕성에서 존경받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경배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 대한 경배는 우상숭배니까요.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

계 22:8

  • 2024-05-03
  • 조회 수 294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1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글을 쓴 이가 요한이라는 사실은 여기 계 22:8절만이 아니라 계 1:1, 2, 4절 등등에도 나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요즘도 영어 이름으로 ‘존’이 흔하듯이, 당시에도 흔해서 실제로 그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만 분명합니다. 그는 ‘보고 들은 자’라고 했습니다. 보고 듣는 행위...

계 22:7 [2]

  • 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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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0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내가 속히 온다.’라는 문장에서 주어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추정되기는 하나 문맥으로만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지금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에게서 말을 듣고 그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이런 문맥에서만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 관점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락에서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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