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7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말은 정결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퇴폐 문명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정결하게 산다는 게 출가 수도승처럼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수도승처럼 사는 게 무조건 정결한 삶도 아닙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정결하다거나 불결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단편 『비계덩어리』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프로이센 군대에 점령당하게 된 루앙시(市)를 탈출하는 마차에 귀족, 부유한 상인, 수녀, 백작 부인 등이 탔습니다. 비계덩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창녀도 함께 탔습니다. 프로이센 장교는 성매매를 조건으로 이들이 탄 마차를 통과시켜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창녀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다른 이들이 여러 말로 창녀를 회유합니다.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장교와 하룻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 옷매무새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뛰쳐나온 창녀는 겨우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바로 전날 갖은 사탕발림으로 회유하던 그 사람들은 다시 창녀를 조롱하고 비웃기 시작합니다. 그런 조롱과 비웃음이 자신들의 위선을 가려준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두루마기를 빤다는 의미이겠지요.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은 실제로 정결한 삶을 향해서, 즉 의로운 삶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절감하고, 거꾸로 의로운 삶에서 멀어질수록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부정합니다. 흔한 말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의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후자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마 5장에 나오는 ‘팔복’ 문장과 계 22:7절에 나오는 단어가 여기 14절에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복이 있으리라)